당신의 ID는 무엇입니까? ID 하얀나비 Login01 론썸 네트워크 (Lonesome Network) [ “모든 세대는 지난 유행을 비웃는다. 그러나 새 유행은 종교처럼 따른다.” 이것은 미국의 한 사상가 헨리 데이빗 소로의 말입니다. 요즘같은 네트워크 시대에는 유행에 민감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죠. 인터넷의 발달과 늘어가는 수요에 넷상에서는 계속해서 여러 가지 서비스 들이 빈발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요새 한참 주가가 높은 메트로에서 제공하는 [론썸 네트워크] 에 관해서 소개할까 합니다. 이제는 그전에 꽤나 유행하던 오로지 자신만의 공간을 위한 블로그나 미니홈피등의 열기가 식어감에 따라 작년부터 서비스에 들어간 론썸은, 영어단어 Lonesome이라는 외롭다라는 뜻으로 혼자만의 공간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구축하는 서비스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주된 서비스는 다들 아시다시피 바로 채팅인데요. 기존에도 많은 채팅관련 싸이트들이 즐비했지만, 메트로쪽은 오랜기간 네티즌들의 기호를 잘 파악해서 여러 가지 즐겁고 편리한 채팅월드를 만들어냈습니다. 첫 번째로 여러 유명 전문 웹디자이너들과 손을 잡고 독특하고 예쁜 아바타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죠. 또 표정과 헤어스타일 옷등이 상상할수도 없이 다양해서 론썸에서 자기와 비슷한 캐릭터를 만나기란 사막에서 바늘찾기보다 어렵다는 말도 있습니다. 두 번째는 가장 호평을 받고 있는 사용자의 기분에 따른 무료 음악서비스와 배경입니다. 메트로는 원래가 음악을 제공하는 작은 업체였는데, 음반계의 큰 레코드업체가 후원사로 나서면서 어느 정도 저작권에 구애받지 않고 채팅을 하면서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겁니다. 특이한 것은 자기가 직접 선곡할 수도 있지만 론썸에 로그인 하고나서 가장 먼저 체크해 주어야하는 77가지 오늘의 기분에 따라서 자체적으로 알아서 노래를 틀어줍니다. 예를 들어 기분을 왠지슬픔으로 설정하면 재밌고 즐거운 노래가 나오기도 하고 울고싶어로 정하면 너무나 슬픈 음악들이 흐릅니다. 그리고 채팅을 하면서 론썸에서 제공하는 무바탕이나 다른색의 평범한 단색들외에 이미지 찾기를 클릭해서 보고싶은 사진이나 제목들을 입력하면 론썸이 순식간에 스스로 넷에서 이미지를 불러와서 채팅 화면 안에 바로 뜨게 됩니다. 세 번째 랜덤 채팅상대에 관한 건데요. 역시나 접속하고 나면 작은 창이 떠서 오늘은 누구와? 하며 론썸의 캐릭터 아론(Alone)이가 나와서 묻습니다. 만나기로 한 상대가 있다면 자유모드를 선택해서 방을 찾아가지만 론썸이 말씀드렸다시피 다른 곳들과 다른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채팅을 꺼리는 사람들의 누군가와 대화는 하고 싶지만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방에 선뜻 들어가기가 곤혹스럽다는점을 알고 있다는 겁니다. 인원수나 성향 성별 기분 취미등을 선택해서 자신이 이야기 나누고 싶은 사람을 찾아서 자동으로 연결해주는 시스템이 있어 좋다는 거겠죠. 그밖에도 메트로에서 자랑하는 갖은 서비스들이 있지만 이 세가지만 가지고도 충분한 설명이 되셨을거라 생각합니다. 현대인은 참으로 외로운 존재입니다. 학교나 직장, 아니면 집에서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친구나 가족에게는 말하지 못할 말들도 있고, 아니면 이야기를 나눌만한 사람이 없거나 하는 경우도 있죠. 글은 말보다 솔직합니다. 그래서 조금 더 마음속에 있는 얘기들을 쉽게 털어놓을 수도 있고 얼굴이 안 보이는 장점을 이용해 할 수 없는 이야기들도 꺼낼 수 있는 겁니다. 요번 달 들어 480만명의 회원수를 갱신하며 나날이 주목을 받고 있는 론썸 네트워크. 지금 당신은 론썸의 아이디를 가지고 계십니까?] 문화 포털부 나 주영 기자(na_jy@late.net) 인터넷 뉴스는 백 이십 프로 광고글이 많다. 나주영이가 메트로한테 돈 좀 받아 먹었구나. 하고 리플을 달까 했지만 그만두었다. 나 역시도 그 론썸의 애용자이기 때문이다. 한 3개월전부터 채팅중독에 시달리고 있다. 나는 게이다. 그걸 깨달은 것은 바로 몇개월 전. 아버지의 전근으로 서울로 전학을 오게 되서 비로소 깨달은 사실이다. 학교에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에게 친구이상의 감정을 가지게 된 것이 문제였다. 녀석의 이름은 반 지율. 심장이 숨 가쁘게 뛰고 머리가 어지럽다. 그런 유치한 문장을 몸소 체험해버렸다. 전학 오고 첫날. 자리에 앉아있던 내게 말을 걸어주었을 때부터, 나는 지율이를 좋아하게 됐다. 하지만 녀석은 이미 여자친구가 있었고, 나는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율이와 여자친구가 헤어지던 그날. 같이 술을 먹다가 나도 모르게 말해버렸다. -네가 좋아 반지율. 지율이는 내가 술 먹고 장난치는 거라고 생각하는 듯 했지만 내가 계속해서 진지하게 이야기하자 갑자기 표정이 굳어져서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3개월전에 있었던 첫 실연이야기다. 그때부터 나는 론썸에 접속한다. 이미 같이 다니던 반지율 패거리에 소문이 더럽게 나버렸다. 친구라는 것들이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난 아직도 지율이를 좋아하고 있다. 지율이는 그때부터 철저히 날 무시하고 있다. 차라리 이럴줄 알았으면 가만히 입 다물고 있는건데, 죽을만큼 후회가 됐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학교에 갔다 와서 언제나 론썸에 접속해 이야기할 상대를 찾는 것이 내 하루 일과가 되어 버린지 오래다. 나는 론썸에서 인형 이라는 아이디를 사용한다. 아이디라는 것은 자신을 나타내는 넷상에서의 표현법이다. 많고 많은 아이디들이 있다. 한글을 쓰는 사람. 영어를 쓰는 사람. 쓰려는 아이디가 있으면 그 아이디 뒤에 자신의 생일이나 특별한 숫자를 붙여 사용하기도 하고, 재밌고 웃기는 아이디를 사용하는 사람도 꽤나 많다. 괴상한 특수 문자를 사용하는 것은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주로 초딩들. 내 나이와 비슷한 또래들은 자신의 이름이 들어가는 아이디도 많이 사용한다. 지나치게 예쁜 아이디를 사용하는 사람들치고 내생각에 정말 예쁜 사람도 없을 듯하다. - 인형(김한결)님. 안녕하세요? 오늘 기분은 어떠신가요? 로그인 로딩시간이 지나자 론썸의 아론이가 나타났다. [조금우울] - 오늘은 누구와? 인원[일대일] 성향[편안한대화] 성별[남] 기분[조금우울] 취미[음악감상] -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동시 접속인원이 많아서 연결시간이 30초가량 소요됩니다. - Loading........ - 3845번 채팅방이 개설되었습니다. 그럼 좋은 시간 되세요 인형님이 입장하셨습니다. 하늘보는성윤 안녕하세요? 인형 안녕하세요. 하늘보는성윤 뭐하시는분? 인형 학생이요. 고2. 님은요? 하늘보는성윤 아 나도 고 2. 여자분이죠? 인형 네. 여자예요. 론썸에서 나는 성별을 여자로 설정했다. 그게 여러모로 차라리 편하다. 가끔 이상한 남자들로부터 "용돈 많이 줄게 만나자." 하는 쪽지만 안 오면 말이다. 하늘보는성윤 동갑끼리 말 놓는게 어때요? 인형 그래. 말 놓자. 하늘보는성윤 넌 기분이 왜 우울해? 인형 응. 차였거든. 친구한테 고백했다가. 하늘보는성윤 아아. 그래...미안. 인형 됐어. 어차피 지난일인데 뭐. 넌 왜그랮. 인형 아 오타. 하늘보는성윤 그냥 좀 우울한일이 생겨서. 인형 무슨 일인데? 하늘보는성윤 말해도 돼나? 들어줄래? 인형 얼마든지. 하늘보는성윤 나 좀 이상해. 인형 뭐가? 하늘보는성윤 이해해 줄라나. 인형 얘기해봐. 하늘보는성윤 그러니까...이상하게 신경쓰이는 사람이 있어. 인형 장난해? 그게 뭐 어떻다고? 하늘보는성윤 ...........................남잔데? 키보드 치다가 모니터에 올라온 글을 보고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인형 진짜......? 하늘보는성윤 응. 내 친구들이 나보고 다 미쳤대. 너도 그런거 같아? 인형 ...아니...그럴수도 있는거 아니야? 그게 어때서. 하늘보는성윤 이런 여자는 또 처음이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조금도 안 이상해? 인형 하나도 안 이상해. 누군데? 하늘보는성윤 그게 이름도 몰라. 하늘보는성윤 얼굴만 아는 애야. 우리 옆학교에 다녀. 인형 짝사랑? 큭큭큭. 하늘보는성윤 아니 그렇게 거창한건 아니고 자꾸 신경이 쓰여서. 두 번밖에 못 봤어. 인형 어쩌다가? 하늘보는성윤 그러니까....학교 끝나고 애들이랑 집에 가는 중이었는데, 어떤 키작은 애가 울면 서 집에 가더라구....그게 묘하게 이뻐보였어. 인형 남자애가 확실해? 하늘보는성윤 응. 교복보면 알잖아. 그리고 그 다음에 봤을때 걔 혼자서 집에 가고 있었는데, 하마터면 말걸 뻔 했어. 인형 말걸어 보지 그랬어? 하늘보는성윤 -_-어떻게 그래. 날 알지도 못하는데. 인형 자신없어? 하늘보는성윤 아니 차라리 여자였으면 어렵지 않겠는데. 남자니까. 못 그러겠어. 인형 그 남자애 많이 이쁜가보지? 하늘보는성윤 응. 진짜 예쁘게 생겼어. 인형 힘내. 잘 되겠지. 하늘보는성윤 나도 그랬음 좋겠는데. 인형 앞으로 어쩔건데;;;;;; 하늘보는성윤 모르지. 친구놈들이 걔한테 고백이라도 하면 날 죽이겠다는데? 인형 하하하. 웃긴다. 두 번밖에 안봤다며 그렇게 좋아? 하늘보는성윤 좋아하는게 아니라 신경이 쓰이는 거라구. 너는 여자애라서 모르겠다. 내가 지금 얼마나 고민하고 있는지 알아? 이녀석 오늘 처음 만난 상대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든다. 나도 남자라고 확 말해버릴까 했지만, 그러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인형 하긴...그런 얘기는 섣불리 꺼내지 않는 편이 좋을 지도 몰라. 하늘보는성윤 말이라도 한번 걸어 보고 싶어. 다음에 만나면 꼭 한번 걸어 볼려구. 인형 걸어봐. 혹시 알아. 잘될지. 하늘보는성윤 아. 내 얘긴 그만하고 너는 왜 그렇게 니 아바타가 저렇게 울상이야? 인형 말했잖아....나 차였어. 하늘보는성윤 친구한테? 인형 그래. 친구한테 고백했는데 처음엔 안 믿다가 나중엔 그냥 나가버리더라. 3개월전인데 아직도 얘기 한마디 안해. 하늘보는성윤 너무하네. 여자애한테. 그런 놈은 빨리 잊어. 내가 내 친구들 소개 시켜줄까? 너 어디사냐? 인형 서울. 하늘보는성윤 핫! 나도 서울. 진짜 소개 시켜줄까? 내 친구들 다 잘생겼어^ㅁ^ 인형 킥. 됐어. 나 아직 맘 정리도 안됐는데 뭐. 하늘보는성윤 음 그래. 언제든지 맘이 정리되면 콜~해. 내 친구중에 매너좋고 반반한 애들로 소개 시켜줄께^_^* 인형 그래 고맙다. 너도 그 애랑 잘 되면 좋겠네. 하늘보는성윤 그러게 말이야. 근데 걔 좀 표정이 어두워 보여서 무서워 ㅠ_ㅠ 인형 ...... 하늘보는성윤 왜 갑자기 말이 없어? 인형 그냥 내 생각나서. 하늘보는성윤 기운내. 깔린게 남자 아니야? 인형 내 경운 좀 달라. 그런기분 알아? 얘 아니면 절대 안돼...하는거. 잊어 볼려구 해도 잊는게 싫어. 포기하고 싶지가 않아. 하늘보는성윤 그럼 포기하지 말고 다시 한번 말해봐. 인형 그런 짓 했다간 나 걔한테 맞아 죽을지도 몰라... 하늘보는성윤 여자애 때리는 남자가 어디 있어? 그것도 자기 좋다는데? 인형 난 좀 특이한 상황이라니까...좋아하면 안돼는 사람...이랄까... 하늘보는성윤 나보다 더 심각해? 인형 비슷할지도....? 하늘보는성윤 어렵네....정말. 인형 세상에 쉬운 건 없지. 하늘보는성윤 맞아. 동감이야. 쉬운건 절대 없어. 인형 무서워. 날 더 이상한 눈으로 볼까봐. 하늘보는성윤 그건 내가 해야 할 얘기 같다? 인형 그런가...? 하늘보는성윤 내가 걔 만나면 때려줄게. 왜 니 맘 자꾸 아프게 하냐구. 인형 말은 고맙지만 너 걔 못 이겨. 싸움 잘하거든. 지율이는 정말로 강하다. 그래서 더 끌리는 건지도 모르지만... 하늘보는성윤 야. 나도 싸움 잘해. 안 믿어도 좋지만 사실이야. 누구한테 져 본적 없어. 인형 잘났다. 큭큭. 하늘보는성윤 응. 나 잘났어-_- 우리 한번 만날래? 인형 ...나중에 한번 보면 좋겠다. 하늘보는성윤 나는 갑자기 너에 대한 관심도가 무럭무럭 자라는데? 어떤 앤지 말야. 인형 평범해. 별 다를 거 없어. 하늘보는성윤 별 상관없어. 그냥 이런 얘기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해주는 게 니가 처음이라서 그래. 인형 ...누굴 좋아하는 게 자기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잖아. 하늘보는성윤 걔도 너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애면 좋을텐데. 인형 아무튼지 오늘 만나게 돼서 진짜 반가웠어. 난 그만 자야겠다. 하늘보는성윤 갈려구? 인형 응 벌써 새벽 1시가 넘었어. 너도 그만 자. 하늘보는성윤 그럼 내일 나랑 다시 얘기할래? 인형 좋아. 얼마든지. 아이디 친구 등록 할까? 하늘보는성윤 난 벌써 했는데...흐. 인형 보통 언제 들어와. 론썸? 하늘보는성윤 한 10시쯤? 너는? 인형 나도 10시정도좌우해서. 그럼 내일 접속해서 너한테 쪽지 보낼게. 그때 다시 보자. 하늘보는성윤 그래. 그럼 내일 봐. 인형 갈게 안녕. 하늘보는성윤 빠빠이^_^ 인형님이 나가셨습니다. 이름이 아마도 성윤인가...처음으로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났다. 이런 이야기 나에게만 해당돼는 줄 알았는데. 그 녀석은 그 아이하고 잘 됐으면 좋겠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호락 호락한게 아니다. 친했던 친구에게 없는 사람인 것 같은 대우를 받을 수도 있는 게 바로 동성애인 것을.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아버렸다. 론썸을 로그 아웃하기전에 [뽀뽀할까요] 라는 남자에게서 온 “오늘 밤 화끈한 대화를 나누실래요?” 하는 쪽지에 "즐이나 쳐드삼." 하고 답변을 보내주고 접속창을 꺼버렸다. Login02 전뇌공간 (電腦空間) 화장실 변기통에 앉아서 소리 죽여 울어버렸다. 손을 씻고 막 나가려던 참이었다. 문밖에서 지율이와 같은 반인 한상철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나도 모르게 비어있는 화장실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지율아. 이따가 학교 끝나고 어디 놀러가자. 요즘 너 왜 그래? 별로 밖에도 안나가고.] [......] [너 아직도 그 김한결 미친 새끼 때문에 신경쓰고 있는건 아니지?] [...설마. 나 요즘 놀러 다닐 기분 아니야.] [그 새끼 볼때마다 밥맛없어 죽겠어. 난 니가 처음부터 김한결하고 친하게 지냈던 거 진짜 맘에 안 들었어.] [...왜? 너 김한결 별로 안 싫어했던 거 아니었어?] [그게...그 자식 면상이 딱 봐도 좀 그렇잖아. 완전 호모삘.] [...볼일이나 봐라.] [너도 그랬잖아. 불쾌하다고. 이제 와서 혼자 다니는게 불쌍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문 하나가 시야를 가린 채로 지율이의 목소리를 듣는 게 이렇게 조마조마 할 줄은 몰랐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장이 쿵쿵 뛰면서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싶었다. 차라리 반에서는 아예 눈길도 안주고 내가 꼭 투명인간인 것처럼 대했다. 지율이는 내가 여기서 자기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도 모르겠지...근데 나는 말야... 여기서 네 목소리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함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혀. 반지율... [왜 대답이 없냐? 지수랑 깨지고 나니까 그런 호모 새끼라도 좋은거야?] [......시끄러. 내가 그딴 더러운 거한테 그런 맘이 들을 리가 없잖아.] 두려움은 현실로 다가왔다. 뻔한 대답임에도 눈에서 뜨거운 기운이 울컥하고 솟았다. 너를 좋아하는 내 마음이 그렇게 더러워? 내가 더럽냐구? 친했잖아...우리. 아무도 모르는 낮선 교실에서 먼저 말 걸어 줬던게 너였잖아? 맨날 인상쓰면서 나한테는 잘 웃어줬잖아? 저녁에 감기 걸린다고 3월초에 니가 매고 있었던 목도리도 싫다는데 나한테 매 주고 그랬잖아? 같이 옷도 사러 놀러 가고 피씨방에서 게임하다 꼬박 밤샌 적도 있었잖아? 니네집에 친구 데려간건 고등학교 올라와서 내가 처음이라며? 김지수랑 싸운날은 꼭 나한테 제일 먼저 전화해서 이야기하곤 했잖아... 김지수랑 헤어졌던 그날도 나랑 둘이서 술마셨잖아... 그리고...그리고 또...뭐가 있더라...뭐가... 그건 기억뿐이지만 분명히 있었던 일들. 더불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들... 그딴 더러운거...? 그래. 그 더러운 자식이 널 좋아해. 좋아한다고...금방 그런 소리를 들었어도 마음이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고 더욱 더 네가 좋아. 알아? 복도에서 요란한 벨소리가 울렸지만, 그 잠시뿐인 소리를 틈타 목에서 참았던 울음소리를 내었다. 입으로 눈물인지 콧물인지 짜디짠 액체가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한상철은 정말이지 날 무척이나 싫어했다. 지율이와 같이 다니던 다른 무리들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특히 더 심했다. 지율이가 같이 있을때엔 내게 시선 주는 것조차 꺼리는 그였지만 지율이가 옆에 없을때는 갈굼의 정도를 넘어선 욕지거리와 구타까지 서슴치 않았다. 학교수업이 전부 마치기 두시간전이었다. 한상철은 날 어디론가 조용히 끌고 가 하루도 빼놓치 않는 그의 신종 놀이이자 장난감인 날 마음대로 가지고 놀았다. 얼굴에 침을 뱉는건 예사고, 눈에 뛰지 않는 옷속에 가려져있는 여러 부위를 단단한 주먹으로 강도를 달리하며 칠때마다 한상철의 표정은 즐거워 보였다. 가슴의 정중앙을 맞고 호흡이 조금 곤란한채로 쓰러져있는 나에게 한상철은 명백한 조소가 담긴 어조로 말을 내뱉었다. [호모도 맞으면 아픈가보지? 그러게 왜 그런짓을 했어? 김한결. 니까짓 게 감히...] 대꾸할 가치도 없는 말이긴 했지만. 그거보다 맞은 곳이 너무 아파서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니가 나타난 뒤로 지율이가 너 같은거랑 어울려 다니느라고...] 그가 심각할 정도로 지율이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게 나와는 다른 남자로서의 동경의 감정이었겠지만, 한상철은 갑자기 나타난 내게 지율이를 빼앗기는게, 멀어지는게 무섭기라도 했던 걸까? 그게 아니라면...호모를 싫어하는 병에라도 걸린 걸까? 이곳저곳 쑤시는 몸의 통증과는 관계없이 그러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잔뜩 어지럽혔다. 난 도대체 왜 이런 놈에게 병신같이 얻어맞고 있는 걸까? 내가 지율이를 좋아하니까? 근데 내가 남자라서? 뭔가가 억울하다...아까는 울고 지금은 맞고, 또 아프고... [--컥!!!] 그가 힘을 주어 걷어차는 발이 정확히 내 배에 꽂힌 것을 마지막으로 오늘의 가장 싫은 시간은 끝이 났다. 10시 10분정도를 몇초 넘어선 시간에, 론썸에 접속했다. - 인형(김한결)님. 안녕하세요? 오늘 기분은 어떠신가요? [울고싶어] 론썸의 77가지 기분 선택은 항상 그날의 내 기분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다. 가끔 이 재미로 이걸 하는 것 같기도 하다. - 인형(김한결)님께 7893번 방 [같이 놀자.]에서 하늘보는성윤님으로부터 부재중 초대 쪽지가 도착해 있습니다. 초대에 응하시겠습니까? (수락/ 거절) 초대를 거절하시면 채팅 랜덤모드나 자유모드로 전환됩니다. [수락] -Loading........ -7893번 채팅방 안에서 좋은 시간 되세요. 하늘보는성윤 왔네. 인형 응. 너 언제 왔어? 하늘보는성윤 1시간전에. 너 기다리고 있었어. 너 언제올지 몰라서 초대쪽지 다 거절했어 ㅠㅠㅠㅠ그러니까 니가 나 책임져. 인형 -_-10시쯤 온다며? 하늘보는성윤 기다려 줬다는데도 불만이야? 이거 웃기는 지지배야^_^ 아...맞다. 얜 내가 여잔줄 알지. 인형 불만은 무슨. 미안해서 그렇지. 근데 너 본명이 성윤이야? 하늘보는성윤 응. 도성윤. 그러고 보니 너는? 너 정보가 전부 비공개라서 하나도 몰라. 혹시 신비주의 가 컨셉이야? 인형 신비주의는...얼어죽을. 다른 사람한테 내 정보 가르쳐주는 거 별로 안 좋아해. 하늘보는성윤 그래도 이런대서 채팅하는 애들은 프로필이나 자기소개 열심히 적잖아? 어떻게든 하나 꼬셔 볼려구. 인형 별로 남자 꼬실려고 채팅하는 건 아니야. 그냥 나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랑 대화가 하고 싶어서 그래. 왠지 편해서 좋아. 얼굴도 모르고, 날 하나도 모르니까...얼마든지 내 얘 기를 할 수 있어. 하늘보는성윤 음-_-/ 아직 젊은 애가 뭔 놈의 사고방식이 그래? 인형 글로 쓸수 없는 말은 없지만 직접 입으로 할 수없는 말은 많다는 걸 깨달았거든. 하늘보는성윤 심오한데? 내가 니 아바타 우울모드에서 좀 벗어나게 해줄께. 쟤 너무 불쌍해 보여. 너 분명 히 뮤직 클립도 엄~청나게 질질 짜는 거 틀어놓고 있지? 인형 응. 기분에 따라서 알아서 나오잖아. 하늘보는성윤 바보야. 울고 싶은 날일 수록 신나는 노래를 들어야지. 신나는 노래? 그런게 뭐가 있지? 난 시끄럽고 그런 노래 별로 안 좋아하는데... 하늘보는성윤 참 근데 너 본명이 뭐야? 그냥 내 이름 가르쳐줄까...어떻게 보면 여자이름 같기도 한데... 나는 잠시 생각 하다가, 누나 이름을 대기로 했다. 인형 김한비. 하늘보는성윤 오오. 이름 이쁜데? 인형 이쁜긴...근데 성윤아. 하늘보는성윤 응 말해. 한. 비. 양. 인형 너 그 신경쓰인다는 애는 오늘은 봤어? 하늘보는성윤 아니ㅜㅜ 얼굴 한번 보기가 하늘에 별따기보다 어려워. 인형 옆학교 다닌다고 안했어? 별따기보단 쉽겠네. 하늘보는성윤 몰라. 오늘 고민 좀 해봤는데. 내가 정말 걔랑 인연이 있다면 또 어디선가 꼭 다시 만날거야 ^0^ 안그래? 인형 ...그래...분명히 그럴거야...난 너보다 그 남자애가 더 궁금하다. 어떻게 생겼는지. 하늘보는성윤 아아. 이쁘다니까. 나 이래뵈도 눈이 좀 높아...63빌딩 수준이야. 인형 어째든 너도...여러모로 힘들겠다. 하늘보는성윤 힘들진 않은데...친구들이 막 짜증내. 완전 미쳤군 도성윤...하면서. 인형 남자가...남자를 좋아 하는게 정말 미친...짓일까? 하늘보는성윤 니가 어제 그랬잖아? 누굴 좋아하는 게 자기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라고. 그걸 마음내키는 대로 정할 수 있다면 정말 편하겠지. 인형 차라리 그랬음 좋겠어. 좋아하자. 하면 좋아지고 잊자. 하면 잊혀지는... 하늘보는성윤 내가 남자 소개 시켜준다니까? 내 주위에 여자내놔!!!하면서 울부짖는 애들 한트럭에 덤으 로 소형차 세대에 넣어도 넘쳐나. 인형 무슨말이 그래.ㅋ 혹시 남고야? 하늘보는성윤 오우+_+ 대단한 추리력!!! 너의 추리력에 감탄먹는ing. 인형 음 남고구나. 재밌어? 하늘보는성윤 재밌겠니? 남자놈들만 데굴데굴 굴러다니는데...암울해ㅜ_ㅜ 인형 근데 혹시 말야. 만약에... 하늘보는성윤 만약에 뭐? 인형 니 친구중에서 어떤 애가 너보고 좋다고 하면 넌 어쩔래? 남자...애가. 하늘보는성윤 으응-_-어려운 질문이네? 뭐. 문수만 아니면 나머지는 생각해볼지도. 하하. 나 정말 호모 되려나봐...-_ㅜ;;; 인형 문수? 하늘보는성윤 내 친구놈들중에서 나도 작은 키는 아닌데 그놈은 키가 거의 2미터 정도 돼거든. 생긴것도 좀 무서워. 걔가 인상한번 쓰면 구라 안 까고 진짜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 피해. 근데 의외로 귀여운 구석이 많아. 멜로 영화보면서 막울어. 우리 그때 쪽팔려서 걔 두고 영화관에서 다 나갈 뻔했어. 뭐랄까. 등치값을 못한다고나 할까? 그래도 착해. 좋은 놈이야. 인형 그럼 문수라는 애만 아니면 나머진 괜찮아? 하늘보는성윤 그것도 확실하게 그렇다고는 할 순 없지만;;; 내 친구들은 다~ 여자 엄청 좋아라 하거든... 아무튼 나 좋다는데 뭐 나쁠거야 없지 않겠어? 남자가 나 좋다고 하면 날 이토록 잘나게 낳아주신 우리 부모님 탓을 해야지. 흐흐.+ 인형 나 어이상실중. 하늘보는성윤 -ㅅ-사진 보내주리? 김한비...너 자꾸 그런식이면 나 삐진다? 인형 알았어. 알았어. 믿을게^_^ 넌 사고방식이 꽤나 자유분방하다? 하늘보는성윤 막내라서 약간 그런점도 없잖아 있어. 제멋대로...? 그쪽이 더 적합한 표현임. 인형 하하하. 하늘보는성윤 비웃어? 그럼 나도 큭큭^0^ 한비야. 근데 너 왜 자꾸 슬퍼? 기분이 울고싶어로 돼있네... 인형 ....... 하늘보는성윤 여자는 웃을 때가 젤 예쁜거야. 누가 여자의 무기는 눈물이라고 하는데, 우는편보다 차라리 밝게 웃고 있는 편이 남자한테는 좀더 효과적인 무기라고 생각해. 인형 나도......웃고 싶은데, 전혀 웃을 일이 없어... 하늘보는성윤 너 친구라는 애...아직도 너랑 얘기 안해? 인형 응. 내쪽은 쳐다봐 주지도 않는걸. 하늘보는성윤 아. 그 자식 진짜 나쁜놈이네. 뭐가 그래? 인형 걔가 나쁜게 아니라...내가 나쁜거야. 말했잖아. 좋아하면 안될 사람이라고. 하늘보는성윤 쯧. 좋아하고 안되고 자시고가 어딨어? 좋으면 좋은거지. 인형 나도 그렇게 생각 했었던것도 같은데...그게 아니었나봐. 차라리 아무말도 안했으면 옆에라 도 있을 수 있었을텐데...후회 돼...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고 싶어. 하늘보는성윤 이미 일어난 일을 후회해봤자 마음만 더 아프고 머리만 복잡해져. 그건 좋지 않아. 무념무상. 자꾸 뒤쪽보지 말고 앞을 봐.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하는 쪽이 더 나을 거 라 생각해. 인형 고마워, 성윤아....너 바보 아니었구나.^_^ 미안. 하늘보는성윤 사실 난 바보 맞아-_- 시험 보면 평균이 40점도;;; 못 넘고, 아는건 쥐뿔도 없지만... 하늘보는성윤 과거에 연연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리는 바보짓을 하지는 않아. 인형 너야말로 심오한데? 하늘보는성윤 김한비...내가 너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너에게 함부로 이런 말을 하는건 좀 그렇지만 말야. 하늘보는성윤 끝났으면, 그게 아니면, 안된다고 확실히 알았으면 단념하고 다른쪽을 보는 것도 좋아. 네가 지금도 마음 아파한다고 그 빌어먹을 자식이 그걸 알아주는 것도 아니잖아. 지나가면 다시는 오지 않을 시간이니까 좀 더 너를 위해서 소중히 해. 인형 강하구나. 너... 하늘보는성윤 너도 마음먹기에 달려있어. 언제든지 말해. 원하는 이상형 타입별로 셋팅해줄께^^ 인형 이렇게 너하고 이런 말하다보니까 무슨 오래된 친구같다...이런기분은 어쩐지 조금 신기해. 하늘보는성윤 친구가 별거야? 마음이 통하면 다 친구야. 우린 어제부터 친구 먹었잖아. 인형 ......고마워...나 진짜 눈물난다... 성윤이...에게 솔직히 조금 감동먹어서 눈물이 핑 하니 돌았다. 한번도 얼굴을 본적 없는 사람이 넷상에서 우연히 이어져 눈앞에 모니터안에 글자들로 나타내져서 내게 앞을 보라고 말해준다. 내게 친구라고 말해준다. 3개월전부터 친구라고 불릴 만한 존재는 없었다. 아무도 반지율 패거리에서 떨어져 나간 나에게 쉽게 다가와서 말을 거는 애들은 없었다. 반에서 날 무존재 취급하는 그 분위기정도는 누구라도 다 느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친구가 없어도...이야기 할 사람이 없어도...그런건 전부 다 필요없으니 지율이가 나를 무시하는게 더 가슴 아프고 쓰렸다. 너무 쓰려서 그게 속으로 파고들어가 상처를 냈는지 항상 어딘가 텅 비어있고 저린 느낌을 주었다. 론썸을 하루도 빠짐없이 찾게 된 것도 그런 이유였을까? 내 텅빈 마음을 위로받고 싶어서, 채워넣고 싶어서... 하늘보는성윤 한비야한비야한비야~너 혹시 우니? 정신을 차리고보니 성윤이가 계속 내(누나)이름을 부르며 “심심하잖아. 힝힝.” 거리며 혼자 놀고 있었다. 인형 미안...잠시 딴 생각중이었어. 진짜 미안해. 하늘보는성윤 울었지? 인형 안 울었어... 하늘보는성윤 음. 우리 귀여운 한비. 얼굴은 비록 못봤지만.ㅋ 암튼 진짜로 한번 만날래? 내가 정말 재밌게 해줄게. 인형 나 못생겼다니까...그러니까 차였지... 하늘보는성윤 여자는 화장하고 머리 이쁘게 빗고 옷 좀 잘 입어주시면 다 이뻐. 인형 만나면 너 실망할거야. 하늘보는성윤 실망 안해. 너랑 진짜 만나고 싶어서 그래. 인형 조금 나중에...나중에 꼭 만나자. 이제와서 성윤이한테 난 남자였어. 하고 어떻게 말하겠어... 하늘보는성윤 꼭이다? 자아. 약속. 도장 꾹. 복사 지이잉~ 복사중... 인형 ^_^알았어. 그 후로도 성윤이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계속하다가 그만 3시가 넘었을 때쯤에야 내일 다시 보기로 하고 그만 접속을 마쳤다. 눈이 감겨오고 졸음이 쏟아졌지만, 성윤이와 대화하는게 정말로 좋았다... 내 뒷자리에서 같은 반 여자 아이들 몇 명이 채팅에 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주제가 론썸에 관한 것들이었다. 나는 의도 하지 않게 귀를 쫑긋거리며 그 말들을 듣고 있었다. [그래서. 너 어제 만났어? 그 채팅 상대.] [야. 말도 마! 완전 사기였어. 22살 대학생이라고 하더니 무슨 아저씨가 떡 하니 나온거야. 나랑 민정이랑 어제 얼마나 놀랬는데.] [나 같이 안가기 잘했다. 채팅하는 애들이 거의 그렇지 뭐. 말로만 자기가 어쩌고 저쩌고. 그렇게 떠들어 대는 애들 치고 제대로 된 애들 한번도 못 봤어.] [아아. 짜증나. 내가 다신 번개같은거 하나봐라.] [상대방도 너 사진하고 다르다고 안 그랬어? 너 사진 맨날 포토샵으로 고치잖아.] [시끄러. 그래도 난 그 정도로 사기치진 않아. 포토샵으로 겨우 눈 좀 크게 만들고 턱 좀 깍은 것 밖에 없단 말야.] 성윤이가 떠올랐다. 왠지 자기 자신에게 자신감이 넘칠 것 같은 성윤이. 성윤이는 어떻게 생겼을까...나한테 거짓말 할 것 같진 않은데... 하긴 나도 성윤이한테 여자라고 거짓말했긴 하지만...나에 대한 것을 부풀리거나 속이진 않았다. 어제 3시까지 했던 많은 대화들중에는 그의 친구들에 관한 것들이 많았다. 듣는것만으로도 무척 재미날 것 같은 애들이 많은 듯하다. 부러울 정도로 유쾌한 집단이라고 여겨졌다. 지금 나에게 친구라고 부를만한 건...아무도 없다. 나는 사랑과 함께 친구도 같이 어디론가 잃어버렸다. 그렇게 낫씽... 수업이 시작되고 마침 담당 시간이었던 담임이 들어와서 진도는 안 나가고, 여러 가지 전달 사항을 전했다. 나는 잘 안 오는 필기용 볼펜 끝을 공책에 마구 돌려가며 수업이 시작하기전에 잉크가 제발 나오기를 기다렸다. 한참을 빙빙 돌리며 원을 그리자 드디어 검정색 색깔이 하얀 종이에 묻어난다. [어째든 너희들 전 시간에 너무 떠들어서 2층 교무실까지 니네들 목소리가 들렸어. 내가 얼마나 선생님들 보기 민망한줄 알아? 이제 고 2쯤 됐으면 공부란걸 좀 해봐라. 오늘 주번 누구야? 가서 자료실에서 프로젝터 좀 가지고 와.] 오늘 주번은 공교롭게도 나였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담임이 또 한명은? 하고 묻는다. [...오늘 결석인데요.] 교실에서 정말 오랜만에 내 목소리가 울린 듯했다. 모두들 내쪽을 쳐다보며 신기해하고 있는 것 같다. 정말로 나는 3개월 전 이후부터 교실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또 누구도 말을 걸어 주지 않기도 했었다. [그럼...어디보자. 한상철. 거기 자는 반지율 깨워서 김한결이랑 자료실 갖다오라고 해.] 그 말에 가장 놀란 것은 네에? 하고 괴상한 대답을 하는 한상철보다 바로 나였다. 숨이 탁 하고 막혔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 이건 뭔가 잘못된 일이다. 나는 지율이하고 절대 자료실까지 같이 갈 수 없을 것 같은 상태라고 여겨졌다. 비합리적인 사고라고 나 역시도 생각하지만...이건 정말...아니다. 내가 어떻게... [...혼자서도...갈 수 있어요.] 반 아이들이 작은 목소리로 웅성거린다. 다들 알고 있다. 그전까지 친하던 나와 지율이가 어느 순간부터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는 다는 걸 모르는 아이는 없다. [웃기는 소리 하지마. 니가 혼자서 그 무거운 걸 다 어떻게 들고 와. 한상철. 반지율 얼른 깨워. 저 놈은 아무튼 제대로 수업을 듣는 꼴을 못 봤어.] [...차라리 그냥 제가 갈게요.] 한상철이 부르퉁한 목소리로 제안했다. 한상철은 싫지만 그래도 지율이랑 거기까지 가는 것보단 더 나을 것이다. 담임이 그말에 잔뜩 찡그린 얼굴로 뭔가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제가 가요.] 그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멈출 뻔 했다. 지율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있었다. [...김한결 뭐해. 따라와.] 지율이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날 보면서. 그날 이후 처음이다. 난 교실 밖으로 걸어 나가는 지율이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저절로 다리를 움직여 뒤를 따라갔다. 잠시 눈이 마주친 한상철의 일그러진 표정 따윈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지율이의 등이 보인다. 반듯하고 잘 뻣은 등. 예전에 한상철이 장난인지 고의인지 다리를 걸어서 삔 다리덕에 딱 한번 업혀서 양호실에 간적이 있다. 아픈 다리보다 지율이가 날 업어주는 게 좋았었다. 나는 기억하고 있다.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지율이와의 거리는 한 1미터 남짓. 눈앞에 지율이의 뒷모습이 있다. 뒤를 돌아보거나 하진 않을 것이다. 아마 어떤 말도 걸어 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다. 정말이지 단순한 김한결. 금방전까진 지율이가 싫다고 할까봐 아니 같이 있는 자체가 무서워서 잔뜩 쫄았었던 주제에 금새 가슴이 뛰는거야? 단순함을 넘어서 한심할 정도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료실까지는 의외로 짧은 시간안에 도착했다. 아쉬웠다. 좀 더 멀었어도 좋았을텐데. 그러면 지율이의 뒷모습을 좀 더 볼 수 있었을 텐데... 지율이가 침묵을 깼다. [뭘 가져 오라고 했어?] 나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오래되고 무거운 프로젝터를 들었다. 우리반은 아직 스크린이 설치되지 않아서 별도로 둘둘 말려있는 작은 스크린도 같이 가져가야 했다. 그래서 담임은 하나가 아닌 둘을 보낸 것이다. [...너 지금 내말 무시해?] 나는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지율이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지율이의 눈을 바라보자 이상하게 등에서 땀이 나는 것 같다. 계속 멀리서 몰래 훔쳐보기만 했었는데 지금 내 앞에서 지율이가 화난 표정으로 서 있다. 왜 저런 표정일까? 나 같은 호모자식이랑 같이 이걸 가지러 온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화가 나는 걸까? [.......] [...니가 그걸 어떻게 들어. 이리 내놔.] [.......] 대답하고 싶지만 역시 목소리가 안 나온다. [김한결.] [.......] [말해. 벙어리야?] [.......] 나는 영사기를 지율이에게 건내주고 스크린쪽을 들었다. 지율이는 기가 차다는 웃음소릴 짧게 내며, 그 자리에서 날 주시하고 있었다. 난 혹시 목소리가 안 나온다는 걸 핑계대고 어쩌면 지율이에게 침묵으로 시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건 그러니까 응당한 섭섭함. [너 입 안 열래?] 나는 몸을 틀어 자료실문을 다시 열었다. 뒤에서 지율이가 다시 한번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때 그거...] [......] [...나한테 그냥 장난 친 거 아니야?] 나는 어느 날 갑자기 동성의 친구를 좋아하는 게이가 되었다. 그리고, 또한 울보가 되버렸다. 또 다시 내 눈물샘에서 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근데...반지율 너...그거 너무 일찍 물어본다...차라리 그 다음날 나한테 그 질문을 했더라면 난 그냥 장난 친거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너한테 거짓말 해줄 수도 있었어. 그걸 말하고 나서 나도 죽도록 후회했으니까... 근데 이제는 못해. 오기로 라도 못해. 난 네가 좋아. 반지율. 네가 날 무시하던 3개월 동안 더 확실히 깨달았어. [장난친거...라고 말해. 김한결. 그럼 우리 다시 에전처럼 돌아갈 수 있어. 나라고 너한테 그러는 거 편했는지 알아?] 뒤돌아 서 있었기에 망정이지 눈물방울이 툭 하고 떨어진걸 지율이에게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다. 그럼 내가 너무나 초라해 지니까...바보 같으니까... [...내가 그날 김지수 때문에 기분이 너무 안 좋아서 일부러 나 웃길려고 그런거 맞잖아...] 잡고있던 기다란 것을 꼭 움켜쥐고 목소리를 짜내었다. [.......절대로...장난...친거 아니야...] 이건 지율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다. 뒤에 있는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있을걸 잘 안다. [......그러니까 넌 예전처럼...나같이......더러운 자식...계속 무시해...이젠...친구 아니잖아...넌 이제 나같은 거...안중에도 없잖아...] 꼴같잖은 자존심에 뱉어버린 말에 상처 입은 건 내쪽이었다. 그대로 교실을 향해서 뛰어가 버렸다. 울어도 얼굴에 별로 티가 안 나는 체질이라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성윤이와 만나기로 한 시간 보다 좀 더 일찍 론썸을 들어갔다. 컴퓨터 하단 오른쪽에 존재하는 시계의 시간은 7시 39분을 나타내고 있었다. 할것이 없었는지라 단한명 친구로 등록 되어있는 성윤이의 아이디를 클릭해서 개인정보를 열어 보았다. 이름은 도성윤. 생일은 8월 19일. 사는곳은 서울. B형. 고등학생. 어제 기분은 싱숭생숭. 취미는 자는척하기. 자기소개란에 맨 아래의 커다란 네모칸에 성윤이의 자기소개가 몇줄 적혀있었다. 오늘은 다시는 오지 않을 어떤 하루니까 항상 최고로 즐겁게 사는 성윤이가 되자. 그리고 그 누가 제발 우울모드에서 좀 벗어나길 바래. 설마 내 얘긴가? 의아하긴 했지만 어쩐지 마지막 줄이 내 얘길 적어 놓은 것 같아서 부끄럽기도 하고 한편으로 기분이 묘했다. 나는 언제나 전부 비공개라서 이런거 적어본적이 없다. 꼭 적으라고 한다면 안녕하세요. 정도나 그것도 아니면...으로 때우곤 했다. 넷상에서 어디를 가입하거나 하면 꼭 자기소개를 쓰라고 하는데 정말 난감하다. 보통 윗줄에서 이것저것 다 물어봐 놓고 더 이상 무슨 할말이 있단 말인가. 나는 어떤 인간이다 하는 걸. 그 작은 네모 칸에 적어버리기엔 [나] 라는 존재는 너무나 복잡하다. 내가 너무 깊게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싫은건 싫다. 채팅모드가 아닌 대기모드에선 쓸데없는 쪽지들이 많이 온다. 주로 “오빠랑 원조할까?” “어디어디 술집 서빙구함. 급료조건 좋음” “여자친구 구해요.” 부터 별 이상한 내용이 담긴 음담패설에 가까운 것들이 오기도 한다. 내가 꼭 게이라서(그렇게 말하기도 실은 조금 우습지만.) 한살 많은 우리 누나의 주민등록을 이용해서 론썸에 가입한 것은 아니다. 여자쪽이 남자와 대화하기엔 쉬운 점도 있었지만, 그건 그전에 내가 사용하던 아이디는 지율이와 그 무리들이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그 아이디를 쓸 수는 없었고, 당시 절실하게 대화할 상대가 필요했었다. 가끔은 론썸 피플서치(people search)를 통해서 지율이의 아이디를 적어서 지금 접속 했나 하고 확인을 하기도 한다. 지율이는 채팅을 많이 하지는 않지만, 심심할때에는 들어와서 시간을 때우곤 했다. 피플서치를 클릭해서 지율이의 아이디인 [나는반지율]을 써넣었다. - [나는반지율]님은 지금 접속중에 계십니다. [정보보기] 오늘기분 [정말짜증] 짜증나? 나는 지율이의 자기소개를 읽어 보았다. 계속해서 머리가 터질 것 같아. 아파. 두통약을 매일같이 먹어도 전혀 낳질 않아. 나보고 대체 뭘 어쩌라는 거야? 왜 그렇게 머리가 아픈데...? 전혀 이해할 수 없어. 반지율. 너 진짜 뭐야...짜증나는 건 니가 아니라 나란 말야... 화면에 아론이가 나타난다. [인형님께 쪽지가 1통 도착했습니다.] 성윤이로부터 도착한 것이었다. [한비야 놀자~ 19:58;13 하늘보는성윤] [접속했네? 성윤이. 19:59;01 인형] [응. 너보고 싶어서 나 일찍 들어왔어. 론썸 완전 중독 수준이야. 20:00:06 하늘보는성윤] [내가 방만들게. 잠깐만^ㅁ^ 20:01:05 하늘보는성윤] 성윤이가 채팅방을 개설하고 나를 초대했다. 인형 안녕? 하늘보는성윤 한비 안녕? 오늘 잘 놀았어? 인형 별로...너는? 하늘보는성윤 응 나 오늘 선생님한테 혼났어. 나 맨날 혼나. ㅠ0ㅠ/ 인형 왜 혼났어? 하늘보는성윤 흣. 고건 비밀. 안 가르쳐 주지롱. 인형 뭐야...ㅋ 하늘보는성윤 야. 한비야.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말야. 인형 뭘? 하늘보는성윤 아무래도 너하고 꼭 한번 만나야 겠어. 이상하게 니가 계속 보고 싶어. 인형 -_-;;; 하늘보는성윤 -_- 아잉~ 만나요. 이쁜 언니. 인형 끈질기군요. 도성윤씨. 하늘보는성윤 나도 왠만하면 이러진 않는데. 자꾸 네가 궁금해. 솔직히 말하면 내가 말했던 걔보다 지금은 니 얼굴이 더 보고 싶어... 인형 나한테 작업 들어가는 거야? 하늘보는성윤 응. 인형 됐네요. 하늘보는성윤 아아. 튕기긴. 인형 튕기는 게 아니라 나 재미없어. 그리고 사람들이랑 만나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해. 하늘보는성윤 그러니까 날 만나야지. 인형 왜? 하늘보는성윤 내가 너 살아있길 정말 잘했다 싶을만큼 재밌게 해줄게. 그러니까 만나주세요^_^/ 인형 =_= 안 보여. 니 글 에러 났나봐. 하늘보는성윤 음. 개그가 좀 늘었는데? 좋은 현상이야. 인형 ...성윤아. 하늘보는성윤 응? 인형 나 오늘 울었다. 하늘보는성윤 왜? 그 자식 때문에? 인형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만, 결국은 내가 약해 빠져서 그런 걸지도 몰라. 하늘보는성윤 쯧. 성질나. 왜 자꾸 우냐? 내 마음 아프게. 인형 고마워... 하늘보는성윤 역시 넌 나랑 꼭 만나야 돼. 내가 너 웃을 수 있도록 해줄께... 인형 나중에 만나. 언젠가는. 하늘보는성윤 또또또~ 나중에 보자고 그러지? 인형 그치만...ㅜㅜㅜㅜ 하늘보는성윤 잠깐만^_^ 내 친구 잠시 난입 할 거 같아. 멋진남자 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인형 누구? 하늘보는성윤 응. 내 친구 문수.ㅋㅋ 문수야 인사해. 우리 한비. 멋진남자 안녕하세요? 인형 네. 안녕하세요. 하늘보는성윤 한비야. 말 놔. 멋진남자 요즘 성윤이가 인형님(?)이랑 노느라 우리하고는 론썸에서 아는 척 도 안해요.ㅠ_ㅠ 이런 배신자. 인형 ;;;;;;;;;;;;;;;;;;; 하늘보는성윤 배신자는 무슨... 자기들도 여자랑 놀면서. 멋진남자 핫. 그래도 너처럼 쪽지 씹고 그러진 않는단다. 도성윤. 하늘보는성윤 -_-내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왜? 한번 6하 원칙으로 말해봐. 멋진남자 웃기네. 인형 ㅋㅋㅋ 하늘보는성윤 거봐 못 말하지? 멋진남자 너 유치해 졌구나. 여자 앞이라-_-;;; 하늘보는성윤 우하하하. 난 원래 유치한 인간이야. 멋진남자 한비라고 했나? 성윤이랑은 여기서 만났어요? 인형 네. 하늘보는성윤 말 까. 쟤한테는 막 대해도 돼. 그치? 문수야? 멋진남자 성윤이한테 속지 마세요. 저놈 원래 여자한테는 한없이 상냥하거든요. 인형 진짜요? 하늘보는성윤 아니야ㅠ_- 한비 너한테만 그래^_^ 멋진남자 성윤이가 오늘 갑자기 한비님 얘길 막 하더라구요. 원래 그러는애가 아닌데. 마음이 통한다 나 뭐라나. 인형 네. 저도 성윤이 좋아요. 하늘보는성윤 거봐. 역시 한비밖에 없어. 넌 그만 좀 나가.-_-+ 이제 귀찮아. 멋진남자 싫어. 나도 여기서 놀거야. 하늘보는성윤 누구 마음대로? 빠빠이~낼봐. 깡문수. 멋진남자님이 강제퇴실 되셨습니다. 인형 -_-뭐야? 금방? 하늘보는성윤 방해자 제거. 자자. 쟨 신경 쓰지말고 계속 놀자. 인형 좀 미안하네;;;;;;; 하늘보는성윤 괜찮아. 문수는 원래 몸만큼 마음도 넓어^_^ 인형 친구 많지? 너? 하늘보는성윤 응. 그런대로. 하나같이 바보들이라서 문제라면 문제지만. 인형 성격 되게 밝을 것 같아. 성윤이. 하늘보는성윤 그럼. 그럼. 나는 성격도 좋고 미모도 좋고. 다아~ 베리 굿이야.^0^ 인형 완전 자뻑이네. 하늘보는성윤 세상은 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거 아니겠니? 인형 나도 정말로 너 만나보고 싶어. 하늘보는성윤 그럼 만나면 돼지? 서울 어디살아? 인형 나도 비밀. 하늘보는성윤 아. 저놈의 신비주의. 내가 만나면 살포시 때려줄거야. 인형 절대로 안 만나면 돼지. 뭐. 하늘보는성윤 레드썬! 넌 도성윤을 만난다. 만나야 한다. 만날 것이다!!!! 인형 유치해. 큭큭. 하늘보는성윤 우리 만나면 뭐하고 놀까? 인형 -_- 하늘보는성윤 음? 둘이서 야한 영화보자구? 인형 -_- 하늘보는성윤 아아. 맛있는 밥도 먹자구? 노래방도 가자구? 좋아좋아. 다 접수 됐어. 인형 혼자서 잘 노네. 하늘보는성윤 그러니까 만나자. 김한비. 내가 성윤이를 만날 수 있을까? 여장이라도 해서 만나볼까? 키도 작고 하니까 누나옷 입고 화장하고 나가면 속을 지도... ...까지 생각하다가 그만 자기 자신에게 깜짝 놀랬다. 나 정말로 성윤이가 보고 싶은건가? 인형 그럼 저녁에 얼굴만 잠시 볼래? 하늘보는성윤 진짜? 그럼 만나주는거야? 인형 만나주기는;;;; 한번 보자. 하늘보는성윤 알았어~ 와아. 신난다·~!!! 인형 언제 볼래? 하늘보는성윤 요번주 토요일? 내일 내일 모레. 어때? 인형 응. 좋아. 하늘보는성윤 학교 수업 마치고 저녁 한 7시쯤 볼까? 인형 그래. 나 만나면 맛있는거 사줘. 하늘보는성윤 오케이. 누구 말씀이라고 감히 거부해? 인형 아하하. 정말 나보고 실망하기 없기야? 하늘보는성윤 난 얼굴 전혀 안봐.^_^a 인형 좀 신빙성이 없군요. 하늘보는성윤 아무튼 기대해. 내가 웃다가 까무러칠 정도로 한비 즐겁게 해줄거야. 인형 아...까무러칠 정도는 좀 곤란한데? 하늘보는성윤 그럼 숨 넘어갈 정도로? 인형 더 곤란해. 하늘보는성윤 빨리 봤음 좋겠네. 내가 너 눈 돌아갈 만큼 멋잇게 하고 나갈게. 인형 음. 기대해보지 뭐;;;; 하늘보는성윤 참 이상해. 채팅같은거 별로 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킬링타임 용으로만 여겼었어. 근데 너랑 얼굴도 안본채로 얘기하다 보니까 막 예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사람같이 느껴져. 넌 안 그래? 인형 나도 그래. 널 알게 돼서 다행이야. 하늘보는성윤 설마 운명인가-_-? 인형 그 남자애는 어쩌고? 하늘보는성윤 -_-‘’ 몰라. 코빼기도 안보여. 애들도 걔하고 뭔일이라도 나면 날 고대로 관에 넣은뒤, 관 뚜 껑에 못 나오게 못질하고, 음지바른 곳에 파 묻어서, 땅에 시멘트 발라서 바로 위에 빌딩하 나 세워 버린대~ 인형 심하다;;;; 하늘보는성윤 그러니까. 난 그냥 좀 신경 쓰인다고 밖에 안했는데ㅠ_ㅜ 인형 다 널 걱정해서...그러는거야. 남자가 남자 좋아한다는 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니까 말야... 하늘보는성윤 그저...그 우는 얼굴이 많이 아파보였어. 마음이 아렸다고나 할까...그래서 내 눈이 그 순간 그 아이한테 멈춘걸지도 모르지. 인형 ...... 하늘보는성윤 얼굴이 뇌리에 틀어박혀서 안 나가더라. 그리고 다시 만나고 싶어졌어. 그런데...그 다음에 그 생각이 머리 속에 가득 찼는데 기적같이 걜 다시 본거야. 인형 그래서? 하늘보는성윤 다시 봤을때는...처음 봤을때는 몰랐는데...무척 차가운 얼굴이었어. 나한테 다가오지마. 하고 그런 오라를 뿜는다고나 할까? 인형 그런 느낌이야? 하늘보는성윤 응. 무슨 세상 다 산 사람 같은 얼굴이길래. 근데 멍청하게도 난 그때 그런 생각을 해버렸어. 인형 무슨생각? 하늘보는성윤 내가 저 얼굴을 웃을 수 있도록 바꿔주고 싶다. 하는거. 분명히 내가 생각해도 남자한테 가지 는 정상적인 감정은 아니라고 봐. 인형 좋아하는 거 같아...? 하늘보는성윤 그걸 잘 모르겠어. 다시 한번 만나면 그땐 좀 더 확실히 알 것 같아. 인형 감정이라는 거...좋아한다는 거...다시 만났을때 분명히 알 수 있을거야. 심장이 내려앉는 기 분. 그리고 눈에 한 사람외엔 아무도 안들어오니까. 눈을 감아도 그 사람 얼굴이 아른거리 고 내 세계의 중심은 그 사람을 향해서 돌아가. 그 사람의 작은 동작 하나 하나에 눈을 뗄 수 없어지니까. 하늘보는성윤 자신에게 하는 말이야? 인형 응.....난 그랬어. 하늘보는성윤 한비야. 인형 어? 하늘보는성윤 다 잘될거야... 하늘보는성윤 그렇게 되새겨. 하늘보는성윤 그건 네가 행복해질 수 있는 최고의 주문이니까. 인형 응. 다 잘 됬음 좋겠다. 나도 그리고 너도... 하늘보는성윤 날 믿어. 이제부턴 계속해선 웃는 일들만 가득할거니까. 인형 얘기만 들어도 그럴 거 같아^_^ 하늘보는성윤 말의 힘이란 건 대단해. 뱉고 나서 후회뿐인 말들도 가득하지만, 정말로 어떤 말 한마디가 내 인생을 바꿀 수도 있거든. 인형 흐음. 그건 경험담? 하늘보는성윤 조금은...그러니까 넌 앞으로 좋은 생각만 하고. 좋은 이야기들만 들어. 인형 내 주위엔 그런 이야기 해주는 사람이 없는걸... 하늘보는성윤 왜? 나 있잖아. 인형 항상......고마워. 하늘보는성윤 아 맞다! 핸드폰 있지? 나 가르쳐줘. 인형 뭐하게? 하늘보는성윤 전화할려구~ 우리 만날려면 서로 전화번호 정돈 알아야 하지 않겠어? 인형 나 지금 감기 걸려서 목소리 이상해. 하늘보는성윤 괜찮아. 그럼 문자라도 보낼게. 가르쳐줘ㅠ_ㅠ 응? 인형 알았어. 대신에 직접 걸진 마. 안 받을 거야. 하늘보는성윤 쯧. 이 냉정한 여자. 좋아 문자만 보낼게. 나는 성윤이와 서로 폰번호를 주고받고 조금 더 대화를 한 뒤 론썸을 나왔다. 그러고 나서야 나 저질렀구나. 하고 후회감이 밀려들어왔다. 어쩌지...그만 만나기로 해버렸다...완전히 미쳤다... ...그래도 잘하면 저녁이니까 잘 모를거야. 난 엄마얼굴을 많이 닮은 편이라 어릴적에도 여자애 같다는 말을 많이들은 편이니까... 지금도 체구도 작은 편에 남자치고는 머리도 긴 편에 속하니까... 하지만...어쩌면 좋지. 순간적인 기분에 사로잡혀, 당치도 않은 약속까지 하고...김한결... 너 뒷 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자리에 눕기 전에 성윤이에게서 “내 생각하면서 잠 들어. 내꿈 꾸면 더 좋고^_^” 하고 진부하면서도 조금 낮 간지러운 문자 메시지가 왔다. “누가 니 생각 한대?” 하고 답 문자를 보내고 30초도 안돼서 다시 녀석에게 “힝. 나 삐질거야.” 하고 살짝 귀여운 문자가 도착했다. 왠지 오늘밤은 잠이 잘 올 것 같다. Login03 Call My Real Name. 성윤이에게 학교에 있을 때 문자가 자주 왔다. 약속을 지키느라 정말로 한번도 직접 걸지는 않았다. 주로 “나 심심해.” “지금 뭐해?” “급식 오늘 진짜 맛없어.” 같은 이야기들 뿐이지만, 학교에서 말 한마디 없는 나에게는 꽤나 즐거운 일이었다. 낮에는 성윤이랑 문자로 이야기하고 밤에는 론썸에서 채팅을 했다. 그렇게 토요일 다가왔다. 성윤이가 “오늘이 드디어 D-day야!” 문자가 와서 혼자 웃으며 나도 그에게 보낼 문자를 입력하고 있었다. 다음시간이 이동수업인지라 교실에는 아이들이 한명도 남아있지 않았다. [뭘 그렇게 혼자 웃고 있어?]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놀랍게도 지율이가 뭔가 마음에 안 드는 표정으로 인상을 쓰며 내 앞에 있었다. [누구하고 문자해? 너 요즘 핸드폰 붙잡고 살던데.] [......] [또 대답안하는 거야?] [...친구...] [친구 누구?] [네가 알바 없잖아.] [내가 알바 없어?] [......] 지율이는 날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난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그냥 책과 필기도구를 챙겨서 교실을 나가기로 했다. [김한결. 잠깐만 기다려.] 옮기던 걸음을 멈추었다. 지율이는 날 불러 세워 놓고 한참을 말이 없었다. [......] [나 생각해봤어.] [......] [아니. 그거보다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뭔데...] [예전에 몇 번...아니 그거 보다 더 많이...너한테 이상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어.] [...무슨 느낌......내가 너 좋아하는거?] [아니. 내가 너한테...] [......] [널 보면 스스로도 웃길 만큼 병신 같은 생각을 했던 적이 있어. 난 그때는 그게 뭔지 잘 몰랐었어.] [나 갈게. 수업 시작하겠다.] [듣고 가.] [......] [내가 김지수랑 왜 깨졌는지 너 혹시 알아?] [싸웠었다며.] [그래. 헤어지기 전전날이었어. 지수가 전화로 아프다고 하더라. 나한테 좀 와 달라고....근데 나 안 갔어.] [왜?] [기억해? 그날 너도 아팠어...감기 걸렸었잖아. 그래서 널 먼저 보고 지수한테 가려고 했는데. ...결국 안 갔어...니가 너무 아파서. 널 두고 김지수한테 못 갔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그래서 나 때문에 둘이 깨졌다는거야?] [그런말이 아니잖아!!!] 지율이의 목소리가 교실을 한 가득 매웠다. [그럼 뭐야?] [......] [이제와서 이런 얘길 나한테 왜 해?] [......] [나 없는것처럼 굴었잖아...나 보고도 무시했잖아...] [......] [더럽다고 했잖아...너 좋아하는게...] [그런 말 안했어.] [...들었어 화장실에서...] 그 말에 지율이는 날 보고 있던 시선을 아래로 내려버렸다. [...김한결...난 솔직히 무서웠어. 내가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했어...그래서 아무 말도 안하려고 했는데. ...그랬었는데...] [......] [이젠 못하겠어...내가 전부 다 미안해...그동안 너하고 아는 척 안 했던건...너한테서 도망쳤던 거야...] [......] 한심해...나 또 우는거야? 지금 왜 울어...왜...? 그걸 보던 지율이가 한 발자국씩 내게 다가온다. 그리고 울고 있는 날 그대로 껴안아주었다. 이거 정말 현실...이야?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하나도 모를 지경이다. 지율이의 낮게 깔린 저음의 목소리가 귓가 근처에서 들려온다. [...미안해...이젠 너한테 안 그럴게...] 손에 들고 있던 책이랑 필기도구가 바닥에 떨어졌다. 오늘이...디 데이였어...정말로... 성윤이가 떠올랐다. 녀석이 해줬던 말이 머릿속에 재차 새겨지고 있었다. 다 잘될거야. [...뭐야..반지율...너...] 지율이가 더 힘을 주어 날 안아준다. [한결아...김한결...앞으로 잘 할게...그러니까...화 풀어...이젠 그런 표정 짓지마... 너 항상 그런 표정이었던 거 나 계속 맘에 걸렸어...니 생각 하느라. 머리가 깨질 만큼 아팠어...태어나서 처음으로 수없이 고민했어...근데 답은 하나더라...내가 솔직해지면 다 돼는 거라고...그럼 전부 돼는 거였어......그러니까 미안해......너 울지마...] [......그 얘기가 아니야...다른말 해줘...] 난 3개월 동안의 가슴앓이에 대한 보상을 기다렸다. 지율이는 날 안은채로 있다가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야 내가 기다리던 대답을 해줬다. [나도 네가 좋아. 김한결.] Logout 성윤은 오늘 기분이 좋았다. 주변의 친구들이 너 얼굴 너무 풀렸어. 하고 태클을 걸어도 그저 미소로 넘길 뿐이었다. [도성윤. 그렇게 좋아? 만나서 영 아니면 어쩔거야?] [몰라. 한비는 분명히 이쁠거야. 아니. 안 이뻐도 상관없어. 칙칙한 니들보다야 여자가 좋지. 안 그래?] [아아. 요즘은 그 남자애 얘기가 안 나와서 참 기쁘긴 한데 말야. 아무튼 한비 만나서 둘이 잘 되면 한비 친구들 나도 소개 시켜줘.] [음. 능력 좋은 바람돌이 주치원군. 니 앞가림은 니가 알아서 하자구.] [치사한놈.] [...근데 성윤아.] [뭔데 강문수? 너에게 그런 진지한 표정은 전혀 안 어울려.] [나 걔 얘기 들었어.] [누구?] [그 있잖아. 니가 우는모습이 인상적이라던 그 옆 학교 남자애.] [문수야. 그 얘긴 제발 좀 닥쳐. 성윤이 새끼. 오늘 여자 만난다는데. 니가 재 뿌리지마.] [그게 아니라...걔 말야. 니네 반지율 알지? 반지율네랑 친한 애였대.] [반지율? 걔가 그놈 친구야?] [어. 그게 둘이서 되게 친했는데 언제부턴지 쌩깐다구 하더라.] 성윤은 한비에게 “오늘이 드디어 D-day야!” 하고 문자를 보내고 답 문자가 오길 기다리며 문수의 얘기는 반쯤 흘려듣고 있었다. 사실 이름도 모르는 그 남자애보다 지금은 얼굴만 모르는 한비 쪽이 더 보고 싶고 알고 싶었다. [이름이 뭔데?] 물은 것은 성윤이 아닌 오늘 머리에 왁스빨이 안 받는다고 아침내내 투덜대던 치원이 계속 머리가 신경 쓰이는지 자신의 머리를 만져가며 물은 것이다. 문수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자신의 이야기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 성윤을 좀 이상하게 바라보며 치원에게 말했다. [그게...아마 김한결이던가?] 성윤은 여전히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은 채로 한비의 회답을 기다릴 뿐이었다. 접속이 종료되었습니다. 다시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Now Loading...] 당신의 ID는 무엇입니까? 두 번째 로그인. ID 하얀나비 ______님. 접속을 환영 합니다. 다시 로그인 하셨습니다. Login04 리얼 월드 (Real World) 지율이네 집엘 갔다. 여전히 크고 깨끗한 집. 지율이네 부모님은 두 분 다 항상 바쁘시다. 그래서 한번도 실제로 뵌 적은 없다. [앉아.] 멀뚱히 서 있던 내게 지율이가 거실에 있는 소파를 고개 짓하며, 앉으라고 한다. 나는 그쪽으로 걸어가 푹신한 쿠션에 몸의 무게를 실으며 지율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지율이는 날 잠시 스쳐지나가는 시선으로 응시하더니, 내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이야기를 꺼냈다. [...너한테 할 얘기가 되게 많을 줄 알았는데...] [......] [그다지 없는 것 같아.] [......] [그냥 내가 괜히 3개월 넘게 혼자 헛짓하고, 니 마음만 아프게 한 것 같아.] 지율이가 내 얼굴을 뚫어지게(정말 뚫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내려다보며 알듯 말듯한 눈빛을 했다. 너 지금 무슨 생각해 반지율? [한결아.] [......] [정말 미안...그거밖엔 할 얘기가 생각 안나.] 지율이의 손이 천천히 내 얼굴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내 빰을 만진다. 그 감촉이 왠지 좋아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정말로, 지금 지율이가 내 앞에 있는 것이다. 괴롭고 힘들던 시간이 지나고, 나의 반지율이 내게로 왔다. 믿을 수 없는 일.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꿈에서라도 감히 꿔볼 수 없었던 일. 이게 꿈이라면 절대 깨고 싶지 않다. 지율아. 네가 정말 좋아... [김한결...그전에 한번 얘기 했었지?] 나는 내려져 있던 눈꺼풀을 살며시 열었다. 지율이의 얼굴이 바로 앞에 보였다. 내가 정말 좋아하던 지율이의 얼굴이다. [내가...너 첫날 봤을 때부터 말 걸어보고 싶었다고.] [응.] [그거. 나 누구한테 먼저 다가가서 아는척 했던 거 처음이었어.] [......] [그리고...누구한테 좋아한다고 고백해본 것도 처음이야. 그러니까...] [...절대로 알아주지 않을 줄 알았어...] [......] [상관없어. 반지율이...네가 나 이렇게 잡아준 것만으로도 난 족해.] [...한결아.] [지금 사라져도 좋을 만큼 행복해.] 지율이가 웃는다. 웃어준다. 안심했다는 표정으로 기쁜 듯 웃었다. [사라지긴 왜 사라지냐.] 그건 정말 꿈이었다. 지율이의 닫힌 입술이 내 입술에 겹쳐지며 다물고 있었던 문을 열었다. 안으로 낮선 것이 들어왔지만 점차 익숙해져갔다. 영원히 깨지 않아도 좋을 꿈... 지율이가 촉촉이 젖어있는, 아까보다 붉어진 입을 떼며 말한다. [너 이거 혹시 첫...키스야?] 왠지 쪽팔렸다. 그렇게 못했나? 잔뜩 상기되어 있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니, 지율이가 쿡쿡거리며 다시 내 얼굴로 손을 가져와 볼을 살며시 잡아당기며 미소 짓는다. [순진하긴...뭐. 내가 첫 키스 아니라고 했으면 넌 죽었어. 오늘.] [...그런게 어딨어. 너야말로 이거 첫 키스 아니잖아.] [너하고 하는 첫 키스야.] 그래. 내가 좋아하는 반지율은 이런 녀석이었지. 지독히 자기 마음대로인 대다가, 이렇게 나한테만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을 만큼 웃어주는 녀석... 두 번째로 다가오는 지율이하고 내가 얼마만큼이나 오래 붙어있었는지 잘 알 수는 없었지만. 확실한건 우주가 세 번 정도는 다시 탄생할 정도로 긴 시간이었던 같다. 뭔가 자연스레 내 상의를 벗겨내고 있는 지율이에게 놀라고 있었는데 거의 다 벗겨져서 허리에 내려 와 있었던 교복마이 안에서 핸드폰이 툭 하니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정지해 있던 사고가 다시 정상적인 활동을 하며, 어떤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맞다! 성윤이!’ 고개를 돌려 지율이네 거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이미 6시가 훌쩍 넘어서 분침이 반도 넘게 지나가 있었다. 그리고 다시 지율이 쪽을 봤을 때 내 교복 셔츠의 단추가 하나도 잠겨져 있지 않았다. [...뭐하려구? 지율아?] [알면서.] 내가 알긴 뭘 알아? 반지율...저기 말야...니가 워낙 손이 빠른 놈이라는 건 예전부터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일단은... [나 그만 가봐야 겠어...지율아...] [...싫어?] 주어 목적어 다 빠진 간결한 물음에 조금 당황하며 입을 벌린채로 어버버거리고 있었는데, 그 순간 지율이가 갑자기 고개를 들며 이상한 표정으로 내 몸을 보더니 표정이 굳어졌다. [누가 그랬어? 몸에.] 고개를 내려 내 몸을 보니 거기엔 한상철이 전에 매일같이 내었던 흔적들이 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그러고보니...몸에 이런게 끊이질 않았지. 나는 어떻게 대답할지 여전히 몰랐다. [...그게 어디 좀 부딪혀서...] [김한결. 너 내가 맞은 자국이랑 부딪힌 자국도 구분 못하는 바본지 알아? 이렇게 군데 군데 멍들어 있는데 지금 부딪혔다고?] [......] [누구야?] 사실은 다 말하고 싶었다. 네가 나하고 아무런 이야기조차 안했었던 그 때에 네 옆에 찰싹 붙어 다니는 한상철이라는 그 개자식이 그랬다고. 그런데, 왠지 그렇게 말해버리면 내가 무척이나 우스워 질 것 같았다. 말하고 싶지 않다. 지율이한테 어디서 맞고 다니는 남자답지 못한 자식이라고 그런 생각이 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풀려있던 단추를 빠른 속도로 잠그면서 부딪힌거야. 하고 다시 변명했다. 지율이가 손으로 내 얼굴을 똑바로 부여잡고 자기 눈에 강하게 시선을 맞추더니. 한참을 노려보며 다시 입을 뗀다. [...이거 혹시 상철이가...그런거야?]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옷을 제대로 다 입은 뒤, 바닥에 떨어져 있는 핸드폰을 주워서 소파에서 일어났다. 핸드폰 빳데리가 다 나갔었구나...어쩐지... [...나 그만갈게. 지율아. 이따가 전화...] [김한결. 만약에 니 몸에 그딴 짓 했던 새끼가 한상철이라면 그새끼 가만 안 둔다.] [......] [씨발...다 내가...] 이건 분명히 중요한 이야기였다. 매일같이 날 괴롭히던 한상철에게 뭔가 복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만, 그런것보다 머릿속에는 이미 성윤이와의 약속밖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7시까지 만나기로 약속 했다. 시간이 없어. [지율아. 정말 아무것도 아니니까 괜찮아. 나 어디 가서 그렇게 맞고 다니지 않아.] 웃으려고 했는데 왠지 모르게 몸에 남아있던 멍들이 그 순간 동시에 내게 항의라도 하는지 뭔가 욱씬 거리면서 아무래도 조금 씁쓸하게 웃음 진 것 같다. 지율이에게 그만 갈게. 하고 인사하고 나올 때까지 지율이는 그 자리에 앉아서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로 아무 반응이 없었다. 집까지 정말 무서운 속도로 뛰어갔다. 난 내가 그렇게 빨리 뛸 수 있는지 오늘 처음 알았다. 저녁을 준비하고 있던 엄마에게 다녀왔습니다. 한마디를 던지고 누나방의 방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올해 고 3이라서 한창 수능 준비에 붙박이처럼 의자에 앉아있던 누나가 의아한 표정으로 날 돌아본다. [뭐야? 김한결?] [누나. 부탁이 있어. 아무 이유도 묻지 말고 나...지금 여장 좀 시켜줘.] 고2씩이나 된 다 큰 남동생이 별안간 나타나서 여장을 시켜달라는데 어느 누나라도 당연히 아무 이유도 묻지 않을 리 없었다. [살짝 미쳤어? 왠 여장?] [그러니까 나중에 말해줄게. 빨리 급해!!!] 누나는 괴상하게 웃으면서 날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피식하는 웃음과 함께 이리와. 하고 손짓했다. [애들이랑 무슨 게임 같은 거 하다가 지기라도 했어?] [응. 그렇다고 치고...내가 여자 같이 보일 수 있게 도와줘. 누나 화장 그런 거 되게 잘하잖아.] [...한결아...넌 화장같은거 안해도 충분히...] 누나는 뒷말을 집어 삼키더니, 의자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은 몸을 일으켜 옷장 앞으로 다가가 고3이 되고나서 잘 입지 않았던 옷들을 꺼내었다. 내게 옷을 던져주더니 입어. 하고 말한다. [뭐. 안 그래도 지겨워 죽으려던 참인데 무슨 영문인진 모르지만 선심 쓰고 인형놀이 한번 하자.] 하얀색 나시 원피스에 밑 길이가 짧은 팔 없는 청 쟈켓이었다. 나보고 이런 걸 입으라고? 누나? [뭐해. 주는 대로 빨리 갈아입어.]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으니 보고 있던 누나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고 있는 게 보인다. [아. 내 동생이지만 내 옷이 나보다 더 잘 어울리는 건 좀 싫은데.] 무릎을 살짝 덮는 치마길이에 스스로 어색함이 극치를 이루었는데, 누나는 날 잡아 앉히고는 얼굴에 뭔가 발라주기 시작했다. 질척한 푸른색 액체를 시점으로 파우더 가루가 휘날린다. 익숙하지 않은 화장품냄새. 남자로 태어난 게 어쩌면 다행이었다. 립글로즈로 마무리까지 해주고 언젠가 인터넷으로 샀다가 엄마에게 한 바가지 욕을 뒤집어 먹은 허리까지 오는 치렁치렁한 가발까지 쓰여 준다. [대신 모자도 써야 돼. 안 그럼 가르마가 되게 어색하거든.] 다시 옷장으로 가서 이것저것 보던 누나가 치마 색과 같은 벙거지까지 건내 주더니, 그걸로 끝. 하고 손바닥을 짝 친다. [저기...나 무슨 트랜스젠더 같거나 하진 않지...?] 누나는 내 모습을 담담하게 바라보더니 두 팔을 팔짱까지 끼고 그 감상을 들려준다. [뭐...밤길이나 조심해. 김한결씨. 우리동네 치안은 아무래도 위험하니까.] [......] [그러고 방을 나가면 엄마가 보고 까무러칠지도 모르니, 내가 나가서 엄마랑 얘기하는 사이에 잽싸게 빠져나가. 신발장에 보면 내 낮은 굽 로퍼 있으니까 검은색이나 녹색 중 알아서 너 좋은 걸로 신고 나가.] [...고마워. 한비누나. 그리고 진짜 미안해.] 나는 지금 김한비가 된 것이다. 김한비가 되야 한다. 누나에게 뭔가 몹시 미안해졌다. [아. 알았으니까 들어 올때 나 야식거리나 사다줘. 안 사오면 알지?] 야식거리 사다주는 건 전혀 어렵지 않은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었다. [누나. 근데 로퍼...가 혹시 구두...말하는 거야?] 그 말에 누나는 자지러지게 웃었다. Login05 Boy Meet Girl? 젠장. 집에 가서 핸드폰 충전 하는 거 까먹었다. 연락할 방도가 없어. 한 백년 만에 택시를 잡아타고 약속 장소로 향하는 마음은 매우 초조하고 불안했다. 시계는 이미 8시를 넘어 간지 오래다. 15분가량 지나서야 드디어 도착을 했다. 택시비를 내고 만나기로 한 대형 패스트 푸드점 앞에서 나보다 더 하얗게 차려입고 있는 치킨 만드는 마스코트 할아버지 모형 앞에 서서, 키라도 재는지 바짝 붙어 뒤돌아서 있는 키 큰 남자를 보았다. 저게 설마 성윤이? 그리로 뛰어가는데 발이 너무 아팠다. 앞으로 구두 신는 여자들은 존경하고 싶을 정도다. 헐떡거리며 서 있던 남자에게 힘들게 목소리를 내었다. [...하아...혹시 도성윤씨?] 최대한 가늘게 낸 내 목소리에 남자는 순간 멈칫 하더니, 서서히 뒤를 돌아보았다. ...정말...눈이 굉장히 크고 저녁이긴 했지만 가게 안에서 새어나오는 빛을 받아 어쩐지 깨끗해 보이는 피부를 가진 사람이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박혀있는 단정하고 잘생긴 얼굴이다. 살짝 긴 검은빛 파마머리에 입고 있는 옷들이 너무나 잘 어울렸다. 정말이지 깜짝 놀랬다. 커다란 눈이 더 커지는 듯하더니, 아무 말 없이 날 보고 있다. [...이 거짓말쟁이...7시라며...?] 삐진 게 확연히 들어나는 목소리였건만, 꽤나 듣기 좋은 음성이었다. 아. 성윤이가 맞구나. [......너 안 오는줄 알았어...그래서 방금 마음으로 사귄 여기 할아부지한테 한비한테 나 바람 맞으면 어쩌죠? 했더니 빙긋 웃으며 곧 올거니까 계속 기다리라고 하더라.] 참 쓸데 없는 생각이지만 저 켄터키 모형 할아버지는 항상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웃고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미안...늦어서...] 두 손을 모아서 미안함을 표시했다. 성윤이는 그런 내게 두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 낸다. [...뭐야...너 못생겼다며...] [......?]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이렇게 예쁘면 반칙이잖아.] 우리 누나가 중학교 때부터 쌓아온 화장 기술로 보아하건데 누나도 여지까지 헛 살은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보다는 사실 칭찬에 내가 좀 부끄러웠다. [...게다가......] 성윤이가 고개를 살짝 쳐들며 흐응. 하는 눈빛으로 나를 관찰했다. [사실은 너 오기만 하면 볼을 막 늘어뜨려서 괴롭혀줄려고 했는데...] 한 손을 올리더니 내 머리에 살짝 콩. 하고 손가락을 튀기며 말했다. [뭐. 그것도 이쁘니까 그냥 봐준다.] 남자가 웃는게 저렇게 밝을 수도 있구나. 어느새 얼굴에 웃음기가 가득해진 성윤이는 웃고 있는게 무척 자연스럽고 이런 표현은 뭐하지만 그야말로 예쁘다고 생각했다. 성윤이는 내 손을 아무렇지 않게 잡으면서 그럼 우리 뭐 먹을까? 하고 묻는다. 도성윤. 정말로 생각했던거 보다 훨씬 더...성윤이다웠다. 약속시간보다 자그마치 약 1시간 반도 지나서야 나타난 나에게 전혀 짜증도 내지 않고 계속 기다려줬다. 정말로 밝은 아이라는 거 오늘에서야 봤지만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저...손...] [뭐야. 늦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나 손 시려. 좀 잡아준다고 닳는 것도 아니잖아.] 여름이 되기 얼마 남지 않은 계절이었다. 게다가 성윤이 손은 따뜻했다. 손이 찬쪽은 오히려 나였으니까. [...근데 김한비. 너 정말 김한비 맞아?] 어디론가 씩씩하게 걷고 있던 성윤이가 나를 보며 물었다. [......] [...이상해...진짜 이상해...기대 전혀 안 했다고 하면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지만...] [......] [이렇게 기대 이상으로 나타나면 나 놀라잖아? 니가 정말 김한비라는 거 못 믿겠어.] 빤히 성윤이를 올려다 봤다. 키가 참 크다. 지율이만큼 큰거 같아. [...게다가...너...] [왜?] [...아니...아무것도...] 고개를 갸웃거리는 성윤이는 다시 한번 내 손을 꽉 쥐더니,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어줬다. 다리가 아팠는데 왠지 신경써주는 거 같아서 고마웠다. 성윤이는 앞에 놓여진 음식들을 전혀 먹지 않고 턱을 두 손으로 받치더니 날 유심히 보고 있다. 계속 장난스럽게 웃는게 그리 나쁘진 않았다. [너 왜 안 먹어?] [응. 너 먹는 것 만 봐도 배불러...라고 말하고 싶은데 사실은 너 아까 기다리다가 너무 배고파서 할아버지 가게에서 팔고 있는 햄버거 좀 집어 먹었더니 지금 그다지 생각 없어.] [그래도 좀 먹어. 한참 클 나이잖아.] [으음. 그럼 한비가 좀 먹여주면 나 받아먹을게.] [...어떻게 그래?] [왜 못해? 먹여주면 돼지. 자 아.] 입을 벌리며 기다리고 있길래 할 수 없이 피자 한 조각을 짤라서 입에 넣어주자, 성윤이가 -누가 먹여줘서 그런가 진짜 맛있네. 하며 오물오물 먹었다. 왠지 모르게 귀여웠다. [성윤아. 나 잠깐 화장실 좀.] 아까부터 긴장 비슷한 걸 했는지, 좀 어색해서 콜라가 가득 든 큰 잔의 빨간색 스트로우만 줄곧 빨아댔더니, 몸에서 당연하게 생리현상이 일어났다. 성윤이는 생글거리며 웃음 짓더니 응 갔다와. 하고 내 얼굴을 본다. 얼굴 좀 그만 쳐다봐. 할 수는 없고. 화장실이나 가야겠다. 실수로 남자 칸에 들어가면 -좆 된다. 그걸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자리를 떴다. 성윤은 멀어져가는 한비의 뒷모습을 홀린 듯이 지켜보다가 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이 상황을 가장 빨리 알아들어줄 친구. -주치원 몇 번의 통화음을 지나 귀에 대고 있던 폰 속에서 드디어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성윤? 너 지금 어디야? 한비라는 애는 만났어?] [...치원아. 나 어떡하지.] [...뭘 어떡해? 왠 개소리야. 다짜고짜. 왜? 별로지? 씨발...내가 너 그럴 줄 알...] [아니. 그게 아니라. 정말 이쁜데...] [뭐? 그럼 잘됐네. 걔 친구들 당장 섭외 해놔.] [조용히 하고 내말 좀 들어봐.] [......] [...나 지금 떨려서 한비 앞에서 말도 잘 못하겠어. 진짜야. 늦게 오길래. 오게 되면 왜 늦게왔어? 하고 좀 삐져볼까 했는데, 막상 얼굴 보니까 머릿속이 진짜 새하얘. 아무생각도 안 들어. 큰일 났어. 만나면 재밌게 해주겠다고 그 쌩쇼를 다 했는데 말이 안 나와. 함부로 장난도 못 치겠어. 나 이렇게 가슴 뛰는거 너랑 그때 풀 버젼 영상 본 뒤로 처음이야.] [......그거 2탄 나왔어. 걱정마. 내가 또 니 심장 한번 들었다가 놔 줄게. 너랑 같이 볼려구 아직 먼저 시식 안했다. 그러니까 병신같이 긴장하지 말고 너의 화려하고 유려한 말빨로 그 여자애를 샤르륵 얼음같이 녹이는거다! 새끼. 뭘 처먹고 이 지랄이야? 니가 언제부터 여자 앞에서 긴장하는 놈이였다고.] [니가 직접 봐봐. 완전 인형이거든...인형같애. 첨 봤어 저런 여자애.] [호오. 우리 도성윤씨가 그럴 정도면 나도 뭔가 구미가 땡기네.] 성윤은 앞자리에 있는 한비의 빈자리를 허전한 눈동자로 고정시키고, 머릿속으로 그 얼굴을 떠올리고 있다. 머릿속에서 하얀 얼굴 안에 눈 코 입의 형상을 맞추며, 어서 저 자리에 다시 나타나 주길 무의식중으로 바라고 있었다. [......게다가...말야. 너 알지? 옆 학교 다니는 그 남자애.] [걔 왜? 내가 그 얘기 하지 말랬지?] [......닮았어. 너무 닮았어. 순간 내 눈을 의심했을 정도야.] [...야. 어쩌면 뭐 동생 같은 거 아니야? 그럴 수도 있잖아.] [모르겠어...한번 물어볼까?] [......아. 지금 생각났는데...아까 학교에서 문수가 걔 이름이 김한결...이라고 안했어? 그 여자애 이름이 김한비...라며?] 그 말과 동시에 한비가 자리쪽으로 돌아와 전화하고 있는 성윤을 커다랗고 검은 눈동자로 지켜보자 성윤은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반으로 접어버렸다. 확실히 눈앞에 있는 저 존재는 잠시라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피자를 먹고 나서 거리에 나와 성윤이와 잠시 걸었다. 밤공기가 시원하고 좋았다. 밥 먹고 나서 맡게 되는 바깥 공기는 어째든 상당한 매리트가 있는 것이었다. 먼저 말을 꺼낸 성윤이가 너의 선택은 두가지. 라고 조건을 제시했다. 팔짱낄래. 아님 손잡을래? 어이가 없어져서 그럼 3번은? 했더니. 없어요. 라는 깔끔한 대답과 함께 또 마음대로 손을 잡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게 전혀 싫지 않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랄까. 남자가 봐도 여자가 봐도 그리고 내가 봐도. 이런 타입이면 누구에게나 환영 받을것같다. 자기말대로 성격도 밝은 것 같고, 스타일이나 외모조건도 어딜 보나 상급이다. 부러워. 그런 마음이 들었다. 나는 누가 먼저 내게 말 걸어주기 전까진 대화의 시도조차 하지 않는 소심한 인간이다. 얼굴도 그저 그렇고. 인생최대의 용기는 삼개월전. 과거가 되어버린 그때 그 고백. 그러고 보니 지율이랑 오늘... 어떻게 이런 날. 이제서야 지율이가 떠올랐을까? 전화 해줘야 돼는데... 성윤이 손이 너무 따뜻해서 잊어먹었어. 하는 웃기는 변명거릴 찾고 있는 김한결. 하지만 지금은 김한비. [한비야.] [어?] [좀 미안해. 별로 재미없지?] [아니. 그냥 너 만나게 된 것 만으로도 좋은데.] [...너하고 만나기 전에 나 혼자서 너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하고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 [머리 속에 네 이름 세 글자가 반복해서 나타나 조금도 여백 없이 채워졌었거든.] [......] [근데 니 얼굴 딱 보니까, 머릿속이 깨끗이 비워졌어.] [무슨 말이 그래...?] [음.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왠지 좀 바보가 된 것 같아.] [바보라며 원래.] [...너무한다. 김한비.] [큭. 그래서 뭐? 지금도 머릿속이 텅 비여 있어?] [아니. 조금씩 채워가는 중이야. 이름이 아니라 본인 실체를.] [...아무튼 똑같아. 정말. 나도 너 어떤 앤지 진짜 궁금했는데. 막상 보니까 정말 생각했던거 그대로야.] [너도 내 생각 했다는 거지?] [응. 심심할때는.] [치. 뭐야 그게. 억울해. 나는 계속 니 생각만 했는데. 좀 불공평하잖아?] [나 심심할 때 엄청 많았어. 나도 많이 했어 니 생각. 그러니까 삐진 척 좀 하지마.] 성윤이와 어제도 만났던 친구처럼 대화를 이루어 나갈 수 있다는 게 놀랍기도 하지만, 이 녀석은 어쨌거나 참 좋다. 좋으면 좋은 거지 별다른 이야기를 덧붙이고 싶지 않다. 마음에서 응. 좋아. 라는 파동이 흘러나왔다. 지금은 그 감정이 너무나도 잘 들린다. 성윤이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오늘 달이 붉은색이라서 참 예쁘다는 말에 나도 같이 캄캄해진 그 흑색 천공을 바라보며 정말로 살짝 붉은 빛을 뛰는 달이 저렇게 예쁘구나 하고 감탄이 들었다. 하늘 보는 성윤이...그 옆모습에 다른 종류의 감탄이 든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지율이 하고는 다른 느낌. 물론 그런 건 사람마다 모두 다른 거긴 하지만 성윤이는... 성윤이는...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적절한 단어가 생각이 나진 않지만 감이나 전해져오는 느낌으로 알 수 있다. 어쩐지 좋은 녀석. 숨 쉬는 게 편해져. 한참이나 위로 쏟구쳐 있던 고개를 내리자, 동공(瞳孔)을 통해서 저 앞쪽에서 걸어오고 있는 작은 실루엣 몇 개에 눈꺼풀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벌어졌다. 저건 지율이...? 옆에 한상철...그리고 같이 다니는 몇몇 아이들. 잡고 있던 성윤이의 손을 꼭 움켜졌다. 이대로 계속 걷다보면 분명히 마주칠거야. 성윤이를 도로 외곽으로 잡아 끌었다. [왜 그래? 한비야?] [...저기 미안한데 잠시만 나 가려주라...저 쪽 앞에 마주치면 곤란할 사람들이 있어서...] 나는 성윤이 등 뒤에 몸을 가리고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성윤이의 옷을 잡아쥐고 어서 그 무리들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스쳐지나가던 지율이의 무한 표정과 한상철이 찌푸린 얼굴로 화를 내고 있는 게 보인다. 지율이는 입을 꼭 다문채로 어떠한 말도 하지 않으며, 뭔가 말하고 있던 한상철쪽을 보지 않고 있었다. 지나쳐가는 무리들이 멀어지자, 성윤이가 입을 떼었다. [...아. 저거 반지율하고 그 아이의 기특한 충견님 한상철 아냐?] 아...놀랬다. 너 지율일 알고 있어? 나는 눈을 깜박이며 입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 말이 입밖에 내어 지지는 않았다. [혹시 쟤들하고 무슨 일 있었어?] [...조금 아는 사이야.] 성윤이는 눈동자를 잠시 위쪽 대각선으로 굴리더니 다시 제자리를 찾고는 그냥 웃을뿐, 내게 별다른 말을 묻지 않았다. [성윤아. 너 쟤네 알아?] [응. 내 친구가 쟤네랑 중학교때 같은 학교였어. 내 친구는 별로 안 좋아해. 사이가 꽤나 나쁠걸.] [......] [별로 말하기 싫으면 말 안해도 돼. 아마 싫었으니까...숨었겠지.] [......] 여장하고 있는 내 모습을 지율이하고 한상철이 보기라도 하면...그건 절대로 생각하기 싫다. 고개를 좌우로 돌리고 있는 내 모습을 지켜보던 성윤이는 다른 내색을 하지 않고, 다시 웃더니 가자. 하고 말한다. [어디를?] 다시 붙잡힌 손이 대답 없는 성윤이와 함께 끌려간다. [지금 어디가?]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꽤나 기분 좋아져.] 그렇게 한참을 가다가 도착한 곳은 시내에 있는 높다란 빌딩 숲중 개중 큰편에 속하는 한 건물앞이었다. 도대체 몇층까지 있을까? 우뚝하니 그곳에 자리한 건물은 저녁이라서 고층의 몇 개의 창문 불빛을 제외하곤 전부 어둠 속에 뒤 덥혀 있다. 원래가 무슨 색이었을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은근한 푸른빛이 나는 듯 해 보이기도 하다 [여긴 뭐야?] [내가 예전에 일하던 곳.] [뭐야? 너 알고 보니. 회장아들 그런 거야?] [큭큭. 설마. 이제 보니 한비는 농담도 잘해.] 성윤이는 날 끌고 건물의 입구가 아닌 뒤쪽으로 데려간다. 작은 뒷문에는 흐릿한 붉은 색이 새어나왔다. 문을 열자 그곳엔 빌딩 경비쯤으로 보이는 아저씨 한분이 소형티비를 보고 계셨는데, 우릴 보더니 마시고 있던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을 내려놓고 눈이 휘둥그래져서 일어난다. [아저씨-!!!] [아니. 이게 누구여? 성윤이놈 아녀? 이 시간에 여긴 워쩐 일이냐? 이놈의 자식. 일 그만두고 여긴 잘 오지도 않더니.] 성윤이가 반갑게 아저씨에게 덥썩 안기더니, 나 아저씨 진짜 보고싶어요! 하고 애교를 담아 말했다. [뭐여? 이놈아. 뭔 일인데? 저 아가씨는 니 여자친구냐? 나 보여 주려고 데려온거여?] [예. 그것도 있고 겸사겸사해서 왔어요. 근데 나 안 보고 싶었어요? 나는 아저씨가 너무 보고 싶어서 학교 수업도 잘 못 듣고, 밥도 하루에 네끼밖에 안 먹고, 잠은 매일 10시간밖에 못자고 그랬는데...히잉...] 이 아이가 말하는 진짜 보고 싶었어. 는 이제부터 절대로 안 믿기로 했다. [아무튼 말하는 건 한개두 안 변했어. 못된놈같으니. 거기 이쁜애야. 너도 이리 좀 들어와라.] 손짓에 좁은 방안에 들어서자 성윤이가 나를 아저씨에게 소개한다. 자세히 보니 눈 아래 주름진 것이 왠지 선량한 기운을 주는 분이셨다. [아저씨. 제 친구 한비예요. 진짜 이쁘죠?] [안녕하세요?] [허어. 니가 우리 성윤이 여자친구냐? 거 참 깜찍하구먼...그래. 여기는 왠 일로 왔다냐?] [아저씨. 있잖아요. 부탁 하나만 드릴게요.] [키 달라는 얘기 빼고 다 들어준다.] [...우와. 어떻게 알았어요? 안 본 사이 감이 좋아지셨는데...? 서전무님이 맨날 갈구러 왔죠? 그래서 눈치가 늘으신거죠?] [시끄럽다. 이것아. 어쨌든 그건 안돼.] [아저씨이~ 제발~ 한번만요. 딱 한번만 주세요.] 아저씨는 성윤이의 불쌍한 표정에 헛기침을 두어번을 뱉고는, 주머니 차고 있던 가득한 열쇠 더미에서 작은 열쇠 하나를 고르더니 성윤이에게 던져주었다. [와. 감사합니다! 역시 우리 아저씨가 최고야! 제가 사랑하는 거 알죠?] [...내가 니 놈 여자친구앞이라 그냥 주는 거여.] 성윤이는 인사를 몇 번이나 하더니, 날 그 방에 연결 되어 있던 작은 문으로 밀어넣는다. 엘리베이터? 내가 아저씨께 고개를 끄덕이며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는 순간 그 문이 닫혔다. [지금 어디로 가? 여긴 뭐야?] [...몇 개월 전에 나 여기서 아르바이트 한적 있어. 빌딩유리 닦는거. 그때 발견한 장소거든. 가보면 너도 후회 안 할거야. 진짜 기대해.] [정말. 너 그런 것도 했어? 안 무서워? 여기 높잖아.] [처음엔 좀 무서웠는데. 나중엔 무슨 스파이더맨 이라도 된 것 같았어. 진짜 재밌어. 위에서 아래를 보는 기분은 말야. 너무 신기해. 사람도 차도 다 자그만해. 내가 마치 뭐라도 돼는 기분이거든. 날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뭐 롤러코스터 그런 것보다 더 재밌어. 나한테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성윤이의 표정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빛나 보인다. 아무래도 짐을 옮기는 용도로 예상되는 이 엘리베이터에서 한참 뒤 땡. 하고 소리가 났다. 문이 열린 곳은 어두컴컴한 계단이 있는 장소. 앞에는 또 다른 문 하나가 있었다. 성윤이가 아까 받은 열쇠를 이용해 문을 열자 시야에 빌딩 옥상이 나타났다. 반은 드넓은 옥상 바닥. 반은 검은색 하늘. 한걸음씩 안으로. 아니 밖으로 걸어 나가자 점차 새카만 하늘과 차갑고 서늘한 밤공기가 밀려들어왔다. 아래에서 맡았던 그 공기와는 다른 성질의 존재였다. [이리 와봐.] 상쾌한 밤하늘의 높은 내음을 뚫고 점차 옥상 난간에 다가섰다. 그리고 눈에는 숨 막힐 정도로 반짝거리는 저녁의 도시 풍경이 들어 왔다. 화려한 네온싸인들. 도시안의 사람들을 유혹하는 저마다 다른 빛의 불빛들... 저 건너 보이는 깊숙한 강을 받침으로 올라서 있는 다리 위 전신주의 광채. 온통 어두운 가운데 고층 빌딩들의 저녁은 아직도 오지 않은 듯 아직도 점들로 표현돼 불규칙하게 전등이 켜져 있었다. 밤의 야경이라는 건 황홀하게 멋지다...그렇게 감격한 기분으로 내려다보니, 정말 성윤이 말대로 신기한 마음이 든다. [꼭 무슨 별 같지 않아? 도시의 하늘은 이미 어딘가 뿌옇게 변해서 사람들이 아무리 위를 올려다봐도 별 같은 건 구경할 수 없잖아. 그래서 그게 어쩔 수없이 아래로 내려와서 저렇게 빛나고 있는 거 같아.] [...응. 나. 위에서 보는 도시 광경이 이렇게 예쁜지 몰랐어.] [너한테 꼭 보여주고 싶었어. 왜 그렇잖아. 내가 가지고 있는 좋은 것들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같이 느끼고 공유하고 싶은 마음 같은 거. 여기는 내가 본 곳들 중에서 제일 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한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풍경이라고 생각했어.] [여기서 맡는 공기는 조금 더 좋은 거 같아. 가슴이 시원해.] [아마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도 모를걸. 멀리서 보는 도시의 불빛이 얼마나 예쁘고 반짝이고 있는지 말야. 저 속에서는 멀리 볼 수 없으니까...주변에 현혹돼서 이런 건 안 보여.] [디카라도 가지고 올걸 그랬나봐.] [다음에 또 같이 보러오자. 그러면 돼. 이런 건 나 혼자 보긴 너무 아까워.] 성윤이는 오늘 처음 만났지만, 항상 이렇다. 내게 좋은 말을 해주고, 편하게 대해주고, 나를 동등하게 하나의 인격으로 보고 있다. 근데 난 뭐지? 거짓말했잖아. 여자라고...이런 애한테 지금 여자라고 속이고 있는 나에게 화가 난다. 진작에 말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 정말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이런건...아니다. 다 틀려. 더 이상 이렇게 속일 수는 없을 것 같아. 꼭 죄 짓는 기분이야... [한비야. 나 뭐 좀 물어봐도 돼?] 성윤이가 나에게 고개를 틀었다. [어?] 무슨 이야기를 묻고 싶은걸까? 혹시 이미 눈치 채 버린게 아닐까? 내가 남자라는거...아니면...뭐지? [...저기. 네가 예전에 말했었던 그...친구...혹시 아까 지나갔던 얘들 중에 있었어?] [...아...그게...] 내가 우물쭈물하며 말을 잇지 못하자, 성윤이가 또 다른 질문을 꺼냈다. [그리고...너 혹시 남자...동생 같은거 있어?] 누구에게 머리라도 세게 맞은 것 같아졌다. 멀리서 차 지나가는 소리가 별안간 크게 들렸다. Login06 무색 (無色) 치원은 조회시간부터 지금 점심시간까지 왠일로 아무런 말없이, 책상에 턱을 받친 채로 무언가 생각에 잠긴 성윤에게 다가가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건다. [...존나게 귀여븐 우리 성윤아. 너 혹시 뭔 일 있었니?] 성윤은 머리에 올려져 있던 치원의 손을 탁 쳐내며 대꾸한다. [...죽을려면 뭔짓을 못해.] [완전 삶은 문어 마냥 축 쳐져 가지고. 초고추장 찍어먹으면 딱 이겠다.] [...안 쳐졌어. 지랄마.] [흐음. 꼴을 보아하니 연애문제지? 이 형님에게 확 털어놔봐.] [싫어...말 안해. 너한테 털어놔도 강아지 발톱만큼도 도움이 안돼.] [그런 반응은 나 좀 섭섭하잖아? 그래도 혼자서 삭히지 말고 누구에게 털어놓으면 마음은 가벼워지지 않나?] [하아...더 무거워질걸? 그때도 괜히 그 얘기 했다가 니가 다 소문냈잖아. 2학년 7반 도성윤. 축! 호모의 길로 빠져들다. 전교실에 다 적어놓은거 너지?] [......그거 문수랑 동섭이랑 민준이랑 그리고 기타등등 31명이 다 같이 한거야. 절대로 그런 서운한 오해는 하지마.] [...나 빼고 우리반 전원이 다 참가 했군.] [아니야. 그날 2명은 결석이라서 같이 안했어. 못했지. 나중에 지들 뺐다고 아쉬워 하던...] 성윤이 여전히 턱을 기댄채로 조용히 눈동자만 올려서 치원을 흘겨본다. [저리가. 오지마. 사라져. 그냥 없어져 버려.] 치원은 성윤 앞에 있는 의자를 잡아 빼어 앉더니 등받이에 두 팔을 기대고 성윤에게 눈을 맞춘다. [진짜 무슨일이야? 어제 김한비라는 애랑 잘 안됐어? 걔 눈이 그렇게 높아? 너로는 도무지 성이 안찬대?] [...그게 아니라...아. 몰라. 머리 아퍼.] [그니까 뭐냐구? 내가 게보린 줄까? 어제 잘려구 양호실 갔다가 머리 아픈척하고 받아 놓은거 몇 개 있는데.] [...있잖아.] [응.] [내가 만약에...진짜로 호모가 되면 너 어쩔거야?] [...너한테는 채팅에서 만난 그녀 김한비가 있다. 도성윤.] [그러니까 어쩔거냐구.] [많고 많은 나의 추종자들 중에서 호모 한명이 있다고 내 인생이 달라질 건 없지.] [지랄을 해요. 아주.] [...문수가 매점에서 빵 사온대. 성윤아. 우리 그거 신나게 먹자. 고로케 너 다 먹어.] 가벼운 웃음소리와 함께 성윤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운명이라는 거 진짜 있는 건가봐.] [새끼. 가끔 어려운 말 한단 말야.] [니가 무식한게 아니라?] [아. 너야말로 지랄 말고 내가 지은이, 현아, 민경이, 상아, 소진이, 다혜, 윤정이, 선미, 현진이, 가은이, 정미, 주희등등 걔네 다 너 줄게. 제발 좀 기운내.] [......치원아.] [어? 왜 연상이 좋아? 그러면...옆집누나가 요즘에 연하를 애타게 찾던데.] [너 이영이는 왜 빼는데?] [...임마. 걘 안돼. 내 본처야. 난 절대 본처는 배신하지 않는다.] [쿡쿡- 뭐. 고마워...진짜 너밖에 없어.] [야. 친구 좋다는 게 뭐냐. 기운 좀 내라. 이건 전혀 너다운 게 아니잖아. 우리 364일 24시간 허파에 바람들어간 빙글이 도성윤씨.] [......] [365일중 뺀 하루는 바로 오늘이라고 치고, 어째든 문수왔다. 빵먹자!] 치원은 잽싸게 달려나가 문수의 빵 봉지만을 낚아챘다. 문수는 씨익 웃으며 품에서 치원이 음료중 가장 좋아하는 초코우유를 꺼내며, 도망친 치원을 유혹한다. 그런데 왠일인지 그날따라 문수가 사온 빵 메뉴에는 이상하게도 고로케가 단 한개도 없었다. Login07 City of Endless Night. [그리고...너 혹시 남자...동생 같은거 있어?] [남자동생...?] [응. 남자동생. 있어?] 뭐라고 말을 해야 돼지. 뭐부터 말을 해야 돼는 거지? 머릿속에 떠오르는게 한가지 있었다. 그것부터 이야기해야 될 것 같다. [나...오늘 그 친구하고 다시 화해했어.] [뭐?] [...미안하대. 이제는 나 받아준대...] [...김한비...?] [걔 이름이 뭔지 알어? 아까 봤지? 반지율이야.] 성윤이의 커다란 눈이 그대로 멈춘 채로 있었다. [...너 설마...] [미안해. 거짓말해서.] 손을 올려 기다란 가짜머리를 끌어 내렸다. 모자가 바닥에 떨어지고 갑갑했던 인조모가 벗겨지자 드러난 머릿속이 개운했지만, 그와 반대로 머리 안은 불투명한 색으로 칠해진 것처럼 혼란스러워 졌다. 어쩌자고 이런 행동을 하고 있는 건지 자신에게 물어봐도 아무 답이 없다. 차마 눈을 똑바로 들 수가 없어, 땅을 내려다 봤다. [......사실은 나 남자야. 미안해. 전부 거짓말이야. 내 이름은 김한비도 아니고...] [......] [...네가 너무 잘 대해주니까...더이상 속일 수가 없었어. 욕해도 좋고, 원한다면 때려도 좋아. 그렇지만 이이상은 내가 못해. 너 정말 좋은 애야...나란 애한테는 과분할 정도로...그러니까... 이런 짓 그만할래...] 말이라는 건 한번 물꼬를 틀면 의외로 잘 흘러나오는 것이다. 내가 감당하기 힘들정도로. [...김한비...아니...너 진짜 이름이 뭐야...?] 조금 주저하며 말하긴 했어도 성윤이의 어투는 아까와 별반 다를 게 없이 차분하고 조심스러운 신중한 물음이었다. 화 낼 줄 알았는데...널 속였는데...너 화 안나...? [......] [이름이 뭐야. 고개들고 내 얼굴 보고 말해줘.] 좀더 강하고 확고한, 무언가 절박한 기분도 묻어있었다. 성윤이 얼굴을 보자. 더 미안해졌다. 바람이 불어 성윤이의 앞머리가 한쪽으로 쓸려 올라가며 단아한 이마가 드러난다. 살짝 올라간 눈썹사이에 살짝 주름이 져 있다. 인상 쓰는건 아닌데, 설명하기 힘든 표정이다. 달빛에 비춰지는 성윤이 얼굴은 빨려 들어갈 정도로 매력있는 것이었다. 해줘야 할 대답은 하지도 않은 채로, 그냥 그 얼굴을 눈에 담았다. 참 잘생겼구나. 저 얼굴이 웃으면 더 예쁜데...좀 웃어보지. 나는 정말로 제 정신이 아니다. [이름 말해. 나 화 안낼게. 그러니까 이름 말해줘.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 내 이름 같은거 말해주고 싶지 않았다. 말하면 뭔가 다 풀려서 없어져 버릴 것 같아서. 이유는 모르겠지만, 차마 입 밖에 내 이름 세 글자를 꺼낼 수 없었다. [그런거...몰라도...상관 없잖아...미안해. 난 더 이상 해줄 말이 없어.] [난 상관있어. 다른 말은 필요 없어. 지금 네 이름이 알고 싶어.] [......] 내 이름같은게 뭐가 중요하다는 거지? 그저 거짓말쟁이의 이름일 뿐인데. 성윤이가 옥상난간에서 조금 떨어져서 다가왔다. 그 입술이 열린다. [내가 얘기 하나 해줄까? 사실은 조금 재미없을 수도 있어. 그래도 들어볼래?] [......] [......옛날에 아주 옛날에 어떤 남자애가 하나 있었어. 그 남자애는 겉으로는 강한척하지만 사실은 되게 외로움을 많이 탔대. 왜냐하면 자기를 지탱해주던 무언가가 어느날 한 순간에 다 사라져 버렸거든.] 무슨 이야기를 하는걸까? 성윤이는. [...있던게 다 사라져 버리고 나서도, 걔는 그래도 아직은 남아 있는 것들이 있었기 때문에 조금은 강한 척을 할 수 있었어. 말 그대로 강한 척이야. 사실은 걘 약해빠졌거든.] [......] [그런데 어느 날이었어. 길을 가다가 그 남자애가 누굴 보게 됐는데, 보고 나서 그 사람이 이상할만큼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어. 정신을 차리고 보면 왠지 그 누군가가 생각이 나서 견딜 수 없었대.] [......] [근데 그 누군가는 이름도 모르고, 더군다나 주위에서 그 사람은 절대 안 된다고 극구 반대를 했다나봐. 그래서 남자아이는 아 그런가보다 하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어쩐지 뭔가 외로워져서 작은 유리병 안에 편지 하나를 넣어서 강물에 집어 던졌어. 나 지금 외로우니까 누가 나랑 좀 놀아줄래요. 하는 내용이었나...그래.] [그런데 그 유리병이 잠시 후 다시 돌아왔어. 다른 내용이 담긴 편지를 가지고 말야. 편지에는 저도 혼자서 외롭고 지금은 기분도 우울해요. 하고 써있었어.] [...성윤아...그 얘기...] [계속 들어봐. 이거 끝에 반전이 있는 얘기야. 아무래도 그 강물은 요술 강물 이었나봐. 편지를 보내면 자꾸 대답이 돌아와. 아무튼 그 남자아이랑 그에게 대답을 해주던 사람은 시간이 지나서 서로 얼굴은 못 봤지만 나름대로 꽤나 친해졌어. 남자아이는 자꾸 그 강물에 떠밀려 오는 대답을 주는 사람에 대해서 궁금해졌지. 과연 어떤 사람일까 하고.] [......] [그리고 어느날. 둘이 만나기로 했어. 남자아이는 그 전날 밤에 잠을 조금도 잘 수가 없었어. 아마 바보처럼 긴장이라도 했었나봐...] [...그래서...만나고 실망했대...? 알고보니 그 사람이 거짓말쟁이니까...?] [내가 말했지. 반전이라고.]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건지 다 아니까...그만해.] [아니야 조금만 더 들어줘. 아무튼 결국 둘이 만났어. 그런데 이게 왠일. 그 상대방이 기대했던거 보다 너무 예쁜거야......너무 예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대. 그리고 말이지. 이상하게도...처음에 말했었던 우연히 봤다는 신경이 쓰인다는 사람이랑 너무 똑같이 생겨서 남자아이는 그게 뭔가가 의아했지만, 뭐. 아무래도 좋았어. 중요한건 만났으니까. 그걸로 된 거야.] [......뭐...?] 혈관이 꿈틀거리며 어딘지 모를 신경을 자극하고 있는 것 같다. 눈에 보이던 배경이 누군가 지우개로 지워버리기라도 하는 걸까? 안 보여. 조금 어지러운 것 같아... [자. 그럼 대망의 엔딩. 누가 썼는지 기억은 잘 안나는데 알퐁스 누구더라? 아무튼 별이라는 책 알아? 그 책에 나오는 목동이랑 스테파네트 아가씨처럼 나름대로 둘이서 지상에 위치하는 별 구경을 갔다가 말야. 거기서 깜짝 놀랄 일이 생겼어.] [...무슨...일...?] 음성이 떨렸다. 그 이야기. 생각이 전혀 안 난다. [...세상에...알고보니까 눈앞에 있는 그 예쁜 아가씨랑 예전에 봤던 그 사람이 말야...] 성윤이가 순간 씨익 웃으며 날 본다. 설마 결말이...아니겠지? 내가 생각하는 결말은 아닐거야...그건 정말로 말도 안돼는 이야기야. 저 두 입술이 떨어지는 게 무서웠다. 하지만 그건 내가 어쩔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동일 인물이었대.] [!!!!!!!!!!!!!!!!!!!] 지금...무슨 말을 하는거야? 뭐...? 동일인물이라고...? 나는 너무 놀라서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성윤이에게 농담하지마. 하는 식으로 바라봤다. [...그러니까. 스테파네트 아가씨. 그대의 본명은 도대체 뭘까요?] [......거짓말...그런 우연이 있을..리 없어...너 지금 나한테 장난치는거지...?] [세상 속고만 살았나봐? 알았어. 대답하기 싫으면 내가 보기를 줄께. 1번 김한결. 2번 또 김한결. 3번 다시 김한결. 4번 역시 김한결....그럼 정답은?] [...너 내...이름은......어떻게 ...알았어...?] [오늘 어쩌다가 들었어. 문수가 가르쳐줬어.] 다리에 힘이 풀려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엄청나게 멍한 기분이 사로잡혀서 눈에서 줄줄 뭐가 나오는지도 몰랐다. 성윤이가 내 앞에 같이 주저앉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말한다. [...아. 절대로 울릴 생각은 없었는데...울지마. 화장 다 지워져.] [...보지마...저리로 가...] [...역시 너랑은 운명인가봐.] [...이상한 소리 하지마...그게 또 뭐야...] [자꾸 울면 넌 올해 싼타 할머니가 선물 안준대. 싼타 할아버지는 올해는 피곤해서 휴식이래. 그래서 대신 할머니가 일하거든.] [......진짜 바보야? 너...?]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우는 게 당황스러워져서 했던 대답은 왠지 일부러 투정을 부린다. [지금 나 너 우는 거 보니까 안아서 달래주고 싶은데...못 그래.] [......] [그러면 내 심장 소리 너한테 다 들리잖아. 쪽팔려서 그런 짓은 못해. 지금도 표정관리하기 힘들거든.] [......웃지마. 마음에...안 들어.] 마음에 안 드는 거 좋아하네. 김한결. [근데 나 또 만나줄거야?] 성윤이는 두 눈을 반짝이며 묻고 있었다. 왜 그렇게 눈물이 나왔는지 나도 모르겠다. 모르는 것 투성이라서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성윤이가 갑자기 내 머리를 마구 헝끄러트리며, 대답안한 벌이라고 말하자, 난 -너랑 앞으로 절대로 안 만날 거야. 하고 울음 섞인 대답을 해줬다. 녀석이 -누구 마음대로? 난 싫어. 그렇게 말하며 손으로 얼굴을 닦아줬다. 진짜로 쥐구멍은 내가 들어가기엔 좁으니 조금 넓은 어딘가에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늘의 별님들이 모두 다 땅으로 내려와 쉬고 있던 밤이었다. 오직 문 라이트가 부끄러운 듯 적색을 지닌 채로 그 안에서 숨 쉬고 있었다. Login08 발진 (發進) 주말을 지나서 언제나 지겨운 월요일이 시작되었다. 글루미 먼데이. 그리고 조금은 바뀌어 있었다. 그건 한상철이 나와 절대로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는 것. 가끔씩 흘리던 비웃음을 볼 수가 없었다. 또 지율이가 나에게 말을 건다. 무서울 정도로. 왜 전화 없었어? 하는 이야기부터, 반 아이들이 전부(정말 전부다.) 입안에 마른 침을 삼킬 정도로 내게 친근하게 대해줬다. 괴리감. 아니 행복감? 토요일을 시점으로 일상이 전부 체인지 되는 혁명이 일어났다. 짝사랑 3개월만에 상대방에게 그 마음을 받아들여졌다. 땅속으로 계속해서 깊게 잠식 되어가던 나를 누군가가 조금씩 꺼내 주었다. 그 사람은 웃는게 정말 눈부신 아이. 영화같은 반전 드라마를 한편 경험했다. 일요일 하루를 솔직히 지율이보다 성윤이 생각에 소비하고 고민했다. 세상 참 좁다고 바로 우리 옆 학교였던 거다. 의심조차 해보지 않았다. 게다가 말했던 그 상대가 나라니. 그리고... ...정말로 그게 나였단 말이야? 믿기 힘든 사실. 근데 사실이래. 현실이래. 현실이라는 게 가끔은 삼류 드라마보다도 더 놀라울 우연도 있는 것이었다. 지율이가 쉬는 시간을 틈타 내 자리쪽으로 건너왔다. 나가자.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벗어났다. 나가기 전에 일부러 한상철을 봤다. 자주 보이던 불만스런 표정이 내 눈에 겹친 순간 바로 고개를 돌린다. 5층 옥상문이 잠긴터라 그 앞 계단에 앉아서 지율이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뭐 먹을래? 사줘?] 점심 먹고 아직 2시간도 안 지났다. 배고플 턱이 없었다. [어. 아니. 배 안고파.] [...학교 끝나고 어디 갈래?] [어디?] [너 가고 싶은대로.] [예전에 같이 갔던데, 거기 혹시 기억나? 우리 하루 종일 굶다가 갔던 집.] [응. 생각나. 맛있었지?] [거기 가서 밥 먹자. 나 오늘 돈 있어.] [...너보고 돈쓰라고 안해.] [뭐야. 니가 사준다고? 그럼 나야 좋지만.] [...근데 김한결. 너 너무 멀쩡하게 있으니까 좀 화나.] [무슨말이야?] [그래도...좀 좋아하는 척이라도 해봐.] [음. 너한테 뭐 애교라도 부리라는 거야?] [응. 좀 그래봐.] 3개월 사이에 지율이는 성격이 좀 바뀐 듯 하다. 쿨한척 드디어 집어치웠구나. 혼자서 웃고 있는데 지율이가 몸을 틀어 날 안아줬다. 반지율표 체향이 호흡과 함께 후각을 자극한다. 그에 상응해 자동적으로 가슴이 뛰는 건 나도 어쩔 수 없다. [...지율아...] [...나도 삼개월은 너무 길었어.] [거짓말.] [길었다니까.] [...잘만 다니던데.] [어딜 봐서?] [...보면 알아.] [너 안경이나 써라.] 반지율이 참 좋았다. 좋아했었다. 지금도 좋아한다. 지금 당연히 너무나 행복해야 한다. 그런데 이 기묘한 불안함은 도대체 뭘까? 누가 웃어주던 게 생각나버려서, 그게 죄책감처럼 느껴졌다. 지율이와 밥도 먹고, 집에 오는 길에 그러니까 두 번째로 키스도 했다. 지율이 눈빛이 갈수록 위험해지는 건 착각이야. 하고 마음을 추스르며 집에 들어가 컴퓨터를 켰다. 습관이라는 건 정말 무섭다. 전원이 켜지고 윈도우 화면이 펼쳐지며, 가장 먼저 클릭 한게 바탕화면에 있는 론썸 아이콘. -인형(김한결)님. 안녕하세요? 오늘 기분은 어떠신가요? 기분 선택에 처음으로 고민했다. 새로운 영역에 관한 잠시간의 선택. 행복해요. 와 아리까리. 뭐가 좋을까? [아리까리] 솔직히 지금은 아리까리가 더 맞는 말 인거 같다. -오늘은 누구와? [자유모드] 친구목록을 열자 성윤이가 접속해있었다. 어쩔까? 쪽지를 보내볼까? 그런데 고민할 새도 없이 아론이가 쪽지 한통을 배달해준다. [인형님께 쪽지가 1통 도착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제게 연락 한번을 안 하시는 김한결씨. 오늘 하루는 어떠셨나요? 21:04:44 하늘보는성윤] [자기도 안해 놓고는-_-:::그날 나 바래다주고 잘 들어갔어? 21:05:02 인형] [글쎄...누가 울던 모습이 자꾸 눈에 밟혀서^_^ 나 연락 일부러 안했어. 21:05:59 하늘보는성윤] [왜? -_- 21:06:08 인형] [그래야 니가 자꾸 내 생각하지. 나 안 보고 싶었어? 아아. 실망인데? 21:07:02 하늘보는성윤] [-_-내가 니 생각을 왜 해? 할일 없어? 21:07:34 인형] [안 믿어요. 내 생각했잖아? 아무튼 이쪽으로 와^_^ 21:08:05 하늘보는성윤] -인형(김한결) 님께 19234번 방 [주치원군 술독 오르다. 야호-!!!] 에서 하늘보는성윤 님으로부터 초대 쪽지가 도착했습니다. 초대에 응하시겠습니까? (수락/ 거절) 초대를 거절하시면 채팅 랜덤모드나 자유모드로 전환됩니다. 이 방 제목은 뭐야? [수락] -Loading........ -19234번 채팅방 안에서 좋은 시간 되세요. 인형님이 입장하셨습니다. 하늘보는성윤 와우. 강림하심. 김한비양. 하늘보는성윤 (귓속말) 여기서는 그냥 한비라고 하자^_^ 응? 멋진남자 안녕하세요? 한비님. 또 뵈요? 깜찍한치원이 그대가 말로만 듣던 김한비양? 나도 안녕? 인형 안녕하세요;:::뭐야 도성윤? 하늘보는성윤 -_-현재 성윤이는 묵비권을 행사중. 인형 친구들? 깜찍한치원이 나는 주치원. 성윤이의 하나뿐인 주인님이예요. 후후후. 하늘보는성윤 쪽팔리게 술독이나 오른 바보야. 그냥 죽어. 깜찍한치원이 제발 방제목 좀 바꾸지;;;; 멋진남자 한비라고 그냥 불러도 돼나? 하늘보는성윤 안돼. 절대로 한비님이라고 해. 인형 편하게 부르세요;;;이름이 문수였나? 멋진남자 오오~ 이름까지 기억해주는 저 센스. 한비 그렇게 이쁘다며? 인형 아니요. 절대로 아닌데요;;;; 깜찍한치원이 성윤이가 니 얘기만 해. 아아. 지겨워 죽겠어. 도성윤 태클반사a 하늘보는성윤 -_-태클 걸 가치도 없음. 한비야 나랑만 놀자. 멋진남자 저런 배알 없는 자식. 그런식으로 나오면 국물도 없어♨ 깜찍한치원이 허허허. 나도 이영이 부른다? 너만 여자 있냐? 멋진남자 -_-_-_-(...문수 구석에서 혼자 논다;ㅁ;) 인형 문수님. 저랑 놀아요^_^ 하늘보는성윤 헉‘ㅁ’ 이럴수가. 그럼 나는요? 인형 그냥 혼자 노세요-_- 깜찍한치원이 한비// 굿~!!!! 맘에 들어 당신>_=b 인형 ;;;;;;;;;;;;;;;;;;;;; 하늘보는성윤 배신자...다 미워. 나 방황할거야. 인형 방황하세요. 멋진남자 안됐소. 마음 깊이 동정하오. 깜찍한치원이 땅만파는성윤// 귀여운 척하지마. 토 쏠려-ㅠ- 하늘보는성윤 헐. 넌 가서 해장국이나 끓여먹어. 깜찍한치원이 이영이 기집애 올때가 됐는데. 이 여자는 서방님이 이토록 아프신데 어디가서 아직도 안오냐. 크아아앙~ㅠ_ㅠ 멋진남자 한비야. 성윤이 만나보니까 어때? 인형 네? 멋진남자 뭐. 쟤 첫 느낌이 어떤거 같아? 하늘보는성윤 (나 살며시 기대중+_+) 깜찍한치원이 재수 없지? 실실 쪼개고 다니고? 인형 생각보다... 인형 근데 꼭 대답해야 돼요? 깜찍한치원이 나한테 살짝만 말해봐. 귓속말을 추천중. 멋진남자 제게도 아주 살며시 귓속말을 남겨줘용. 인형 귓속말까지야;;; 성윤이. 좋은데요...그냥 잘생겼다...정도? 멋진남자 -_-도성윤 한비한테 뭐 사줬어? 여자한테 쓸 돈은 많지? 깜찍한치원이 허허헛. 한비님. 괜찮으니 내게 사실을 말해줘여. 하늘보는성윤 니네 다 나가. 멋진남자 즐즐즐. 방장은 나요ㅗ 깜찍한치원이 깡문수. 쟤야말로 당장 쫒아내ㅗ-_-ㅗ(<-고맙지? 두개야.) 멋진남자 가엾잖아. 냅둬~ 인형 아하하...성윤아. 너 당하고 사는구나? 하늘보는성윤 저것들은 내 친구도 아님.ㅠㅠㅠㅠ 멋진남자 우리는 성윤이 놀려먹는 재미로 이 거친 세상을 산답니다. 깜찍한치원이 그럼 그럼. 나의 삶은 성윤이가 없었으면 아마도 무척 시시했을거야. 하늘보는성윤 니네 한비만 없었어도...죽었어. 주치원 너. 이영이한테 일를거야. 딴 여자들이랑 바람핀다고....이영이폰번호가 뭐더라? 깜찍한치원이 -0-/......아잉. 성윤씨. 싸랑해요~제발;;;;플리즈~♡ 멋진남자 성윤아. 이영이 번호= 010 764 58*7. 어서 콜콜콜~ 하늘보는성윤 이런 박쥐 같은자식. 너도 필요 없어. 깜찍한치원이 한비야. 우리 성윤이 잘생겼지? 와. 매너좋아 성격좋아 키도크고 참 잘났어? 다만 공부를 조금. 아주 조금 못해서 그렇지^_^? 멋진남자 갑자기 더럽게 비굴하심. 인형 성윤이 공부 그렇게 못해요? 하늘보는성윤 아니야. 나 그래도 쟤네보단 잘해. 멋진남자 우리 성윤이는 말이죠. 흐흐흐+_ + 깜찍한치원이 바보래요~완전 바보~ 하늘보는성윤 주치원...나 폰 열었다... 깜찍한치원이 -ㅁ-;;;; 깜찍한치원이 천재래요~완전 천재~ 깜찍한치원이 젠장-_ㅜ 인형 큭큭큭. 어떻게 진짜 웃겨. 하늘보는성윤 아. 머리 아퍼. 한비 차라리 부르지 말걸. 인형 아냐. 나 재밌어. 하늘보는성윤 (귓속말) 바보야. 너 보고 싶었어. 인형 (귓속말) 응 나도^_^ 하늘보는성윤 (귓속말) 진짜로 니 생각만 계속 했어. 멋진남자 치원아. 속은 좀 어때? 깜찍한치원이 박카스가 좋을까? 속청이 좋을까? 하늘보는성윤 그냥 지구를 떠나시죠. 너 술 좀 작작 먹어라. 인형 (귓속말) 술 먹었어? 너네? 하늘보는성윤 (귓속말) 응. 난 별로 안 먹었는데. 치원이가 술 먹고 갑자기 얼굴에 뭐가 난다고 해서. 쟤 원래 술 잘 못해. 깜찍한치원이 내가 지구를 뜨면 날 사랑해주는 수 많은 여인네들은 어떡하니? 난 마음이 비단결같이 고와서 그런 짓 못해. 멋진남자 약이나 처먹어. 인형 (귓속말) 니 친구들 너무 웃겨ㅋㅋ 하늘보는성윤 (귓속말) 김한결. 한결아. 인형 (귓속말) 어? 왜? 깜찍한치원이 약이나 사줘보고 그딴 소리해. 아우. 쏠린다. 멋진남자 너 그만 자라. 내일 학교나 나와. 쳐 자지 말고. 하늘보는성윤 (귓속말) 나랑 내일 보자. 할 얘기 있어. 인형 (귓속말) 무슨 얘기? 깜찍한치원이 난 아직 멀쩡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자. 도성윤이 여자 꼬시는 장면을 목격하고야 말것이다!!! 멋진남자 근데 한비. 설마 잠수중? 인형 아니요. 하늘보는성윤 아저씨. 신경 꺼주세요. 저와 대화중입니다^_^ 깜찍한치원이 윽. 내가 저럴 줄 알았어. 하늘보는성윤 (귓속말) 아무튼 내일 학교 끝나고 너네 학교 앞에서 기다릴게. 인형 (귓속말) 그건 좀...그냥 다른데서 보자. 하늘보는성윤 (귓속말) 알았어^_^ 전화한다? 너 받을거지? 인형 (귓속말) 응. 받을게‘ㅅ‘ 멋진남자 나 배고파...뭐 좀 먹어야 겠어. 깜찍한치원이 아까 술안주 니가 다 집어먹었잖아-_-돼지야. 멋진남자 니네 집 가면 먹을 것 좀 있냐? 깜찍한치원이 -_-우리집은 가축출입금지. 하늘보는성윤 너무한다. 지도 짐승이면서. 여자 잡아먹는 짐승. 깜찍한치원이 갑자기 순진한 척하는 도성윤. 오늘 너의 정체를 다 까발려 주겠다!!!! 인형 네. 알려줘요+_+ 하늘보는성윤 ;ㅁ;ㅁ;ㅁ;문수야. 한비 좀 내보내. 멋진남자 배고파ㅠ_ㅠ 밥줘... 성윤이 친구들은 역시 재밌는 애들이었다. 그걸 계속해서 느끼며 꽤나 재밌게 채팅이란걸 해봤다. 몇시에 끄고 잤는지 생각도 안날정도로. 자기전에 눈이 거의 감긴 상태로 성윤이하고 조금 길게 통화했는데, 성윤이가 나보고 둔탱이. 라고 했다. 근데 이유를 모르겠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지금 못 말하겠다는 건 왜지? 그런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나 싶다. 학교수업을 마치고 (어제 무리해서 좀 힘들었다) 지율이와 교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도성윤. 이건 정말 환상의 타이밍이잖아. 그곳에 성윤이가 있었다. 나 당황해야 돼나. 어쩌지. 외도중인 부인이 남편과 길을 가다 바람 피는 상대를 만난 것 같은 싫은 기분이 든다. 표현법에 분명 무리가 있다. 지율이가 이쪽을 보는 성윤이를 노려보더니,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다? 도성윤.] [반지율. 난 며칠전에 너 봤어. 별로 오랜만은 아니야.] [무슨 일이야. 남의 학교 앞에서?] [글쎄. 바로 옆이 우리 학교니까. 내가 여기 있어도 이상할건 없지만. 뭐. 너네 학교에 온 목적이라면 있지.] 저벅저벅 다가오는 발 소리에 모든 신경이 집중된다. [한결아. 기다렸어.] [...안녕. 또 보네...] [뭐야? 둘이 알아?] 지율이가 놀란 빛은 띠고는 날 본다. [응. 알아. 우리 친해. 나 한결이한테 지금 조금 볼일이 있는데?] [무슨 볼일?] [알아서 뭐하게? 니가 한결이 뭐라도 돼?] 왠지 말하는 투가 성윤이 스타일이 아닌것 같다. 꼭 시비라도 거는 것처럼. [......] 지율이는 내 시선을 빤히 느끼고도 아무런 말이 없다. [그럼 한결이하고 갈 때가 좀 있는데, 먼저 가도 돼지?] [안돼.] [......] [얘하고 어딜 간다는 거야?] [그거야 모르지. 너한테 가르쳐 주고 싶지도 않고.] [...지율아. 나 성윤이 하고 약속했어. 오늘 보기로.] [...성윤이? 너네 정말 친해?] [...친구야.] [......김한결.] [미안해. 약속했어. 만나기로. 너 어차피 오늘 바쁘다며? 그러니까...] [안 바빠. 그러니까 너도 쟤랑 가지마.] [반지율. 안본사이 성격 더 이상해졌네? 아. 치원이가 너한테 안부 전해달래.] 지율이가 치원이라는 이름에 분명히 움찔한걸 봤다. 둘이서 내가 모르는 무슨일이 있었던 걸까? [......] [나 갈게. 지율아. 이따가 전화하자.] [쓸데없는 생각이 아니라면 좋겠어. 전화할게.] 의외로 조용하게 가보라고 한다. 질투해주길 바란 건 아니지만, 좀 이상했다. 너 표정이 이상해. 반지율. 성윤이하고 가다가 뒤를 힐끔 보니 지율이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 누구한테 하는 건지 왠지 궁금했다. 정말 다 좋았다. 같이 게임센터에 가서 논 것도 좋았고, 길거리에서 파는 음식들을 사먹은 것도 맛있었다. 이런거 저런거 전부 다 재밌었는데... 그래. 무척 즐거웠는데. 성윤이가 그 말을 하기전까지는 말이다. [뭐?] [다시 말해줘?] [...성윤아. 저기 말야. 말했잖아. 나 지금 지율이하고...] [...알아. 아는데 말하는거야.] [그럼...왜...] [상관없어. 어쩌자는 거 아니야. 그냥 널 보면 좋아. 같이 있으면 좋고, 너 웃는 것도 너무 좋고. 너라는 자체가 다 좋아. 난 그래.] [도성윤.] [알고 있으면 돼. 반지율하고 헤어지라는 것도 아니야. 네가 그 녀석 좋아하는 것도 알아.] [......저기...성윤아...] [또 곤란하게 만들려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말하고 싶어졌어. 할말 있다고 했잖아.] [......] [난 김한결이 좋아. 그거면 돼. 말하고 나면 스스로 더 확실하게 알 것 같았어.] 나는 성윤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친구?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좋아하긴 해. 분명히. 친구이상으로. 그런데. 이 상황에서 내가 고백 같은거 받는다고 어쩔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반지율. 내가 좋아하는 사람. 짝사랑? 지금은 아니다. 항상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 사실은 성윤이가 나에 대해 가지는 호감이상의 감정은 어렴풋이 아니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저 따뜻하게 다정하게 대해 주는게 좋아서 그거에 어리광이라도 부리고 있었던 걸까? 우유부단한 성격도 아니고, 여기서 확실히 말해줘야 되는데. 네 마음 받아줄 수 없으니 아무런 기대도 하지마. 하고. 그런데 왜 그 얘기가 안 나오지...? 왜? 성윤아. 그렇게 나 보면 나 미안하잖아. 죽도록 미안해지잖아. 내게 끌린다고 해서 너에게 갈 만큼 지율이에 대한 내 마음도 그렇게 가벼운 게 아니야. 난. 지금 뭐라고 대답을 해야 돼? 가르쳐줘. 아무라도 좋아. 지율이 옆에 있고 싶은데, 그런데도 성윤이 놓치기 싫은 거잖아. [나도...성윤이 네가 좋아...나도 네가 웃는게 좋고 옆에 있으면 너무 편하고 좋은데...같이 있고 싶은데...] [......] [그런데 지금은 지율이 놓을 수 없어. 반년이야.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라 할 수도 있어.] [......] [하지만 그건 나한테는 너무 긴 시간이었어.] [나...지금 와 달라는 얘기 아니야. 물론 니가 나한테 왔으면 좋겠어. 내가 반지율보다 더 너한테 잘해주고 더 웃게 해줄수도 있어. 그러고 싶어...그런데 아직은 아니라는 거 알아. 그러니 우리 계속 이렇게 지내. 나 기다릴거야. 천천히. 니가 나 돌아볼 수 있도록 조급하지도 짜증내지 않고 계속 여기 있을게. 그러니까 천천히 와.] [...나 그런 말 듣자는 게 아니라...] [사실은 질투나. 아까도 질투 나서 죽을 뻔했어. 근데 말했지? 내가 너 웃게 만들어 줄거라고. 네가 웃고...행복한...채로 있는게 더 좋아...] [......그런거 싫어. 왜...너 같은애가 나같은걸 좋아해서..힘들어야 돼?] [...누가 너 같은거야? 김한결. 널 처음에 우연히 봤을때...니 우는 얼굴에 신경이 쓰였어. 막 이상하게 내 마음...이 아픈 것 같았거든...그리고 두번째로 다시 봤을때는 난 네가 무표정 한게 싫었어. 왜 웃지 않을까...저 아이는...? 웃었으면 좋겠다...그러면서 어쩔 수 없이 지나쳤었어. 왜냐하면 그때는 너하고 모르는 사람이었으니까...] [......] [널 세 번째로 만났을때. 나 솔직히 심장이 덜컥 하고 내려앉을 뻔 한거 알아? 그 아이랑 너하고 너무 똑같이 생겨서 이건 정말 운명일지도 모르는구나...하고 생각했어. 아니. 진짜 운명이구나. 하는 마음이 들더라. 그런데 나중에...니가 그 아이랑 동일 인물이라는 거...알았을때...나 그때는...] [......] [그때는 어떻게 해서든 너 안 놓칠 거라고 다짐했어.] [...나...너한테 그런 말들을 자격 없어.] [그런건 내가 정해.] [......] [미안해. 하지만 네가 좋아. 니가 그랬지? 누굴 좋아하면 세상이 그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맞아. 나 지금 널 중심으로 내 모든 게 돌아가.] [그만해.] [...응. 나 할 얘기 다 했어. 너 그냥 아무 생각하지 말고, 앞으로도 나 평상시처럼 대해줘.] 성윤이는 다시 웃었다. 웃었는데, 그게 아파보였다. 절대로 내 기분 탓이 아니었다. 그렇게 헤어지고, 한 일주일을 넘게 성윤이에게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나도 아무런 연락을 하지 않았다. 또 지율이는 여전히 나에게 과할 정도로 잘 대해주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성윤이가 자꾸 보고 싶었다. 하지만 예전과 마찬가지로, 지율이 역시 좋았다. 아예 지율이에게서 그 마음이 멀어지기라도 하면 좀 더 나았을 텐데. 그건 너무나 모순된 마음이었다. 머릿속에는 매듭이 잔뜩 또아리를 튼채로 제멋대로 엉켜있다. 그걸 풀 생각도 안하고 시간에 흘러가도록 방치하는 중이다. 왜...난 이렇게 이기적일까. 왜 남자를 좋아하고, 남들과 다른 걸까. 생각할수록 답에서 멀어져 가는 기분이다. Login09 무제 (無題) 지율이가 주치원이라는 애에 관해서 이야기 해주었다. 둘이서 지율이네서 술을 먹다가 나온 이야기였다. 원래는 둘이 중학교때부터 친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와서도 학교는 갈라졌지만 계속 연락하면서 지내는 사이였다고. 그리고 의외로 다시는 나올 것 같지 않던 김지수 이야기가 나왔다. [그때는 나도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어.] 주치원이 김지수를 좋아했다고 한다. 근데 김지수가 지율이를 마음에 들어 했고, 지율이도 그때는 김지수에게 상당히 끌렸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결국 둘이 사귀게 됐는데. 그 후부터 주치원하고 멀어지게 됐다며, 원래 여자가 많았던 녀석이라 그다지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는데. 알고 보니 김지수를 무척 좋아했었던 거 같다고 한다. 술을 한잔만 먹어도 상태가 안 좋아지는 체질이라 술은 거의 입에도 안 댔는데, 들리는 말에 의하면 엄청나게 술을 먹고 다닌다고 그랬다. 유치하게 여자 때문에 멀어지고 사이가 나빠져서, 지율이도 그게 싫었지만. 솔직히 미안한 마음에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며 말을 흐렸다. [...그런데 니가 전학을 왔어. 나도 김지수 그전까진 정말로 좋아했었는데.] [치원이가 그랬어. 둘이 깨지면 나 절대 용서 안한다고. 지금도 날 용서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니가 지수 행복하게 해주라고.] [...올해부터 왠지 김지수랑 많이 싸우게 된거 같아. 자기한테 뭔가 소홀 해진거 같다고 서운해 했어.] [왜 그랬을까? 응? 김한결? 그렇게 쳐다보지만 말고 말 좀 해봐.] [...나도 모르지. 왜...여자친구랑 노는거 보다 너랑 노는게 더 좋았는지.] [무서웠어. 니가 그때 그 얘기 했을때도...분명히 기뻤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러면 안 될 거 같았어. 그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도망갔어. 그리고 당황해서 술김에 상철이 한테 전화했어. 나도 모르게 있었던 얘기 다 해버리고...근데 듣고 있던 상철이가 그러더라? 그래서 너 어쩔건데? 하고 묻길래...뭔가 심한 이야기 해버리고...그날부터 널 똑바로 볼 수가 없더라. 상철이 눈치도 보였고...그렇게 삼개월동안 진짜 엄청나게 고민하고...그랬어.] 지율이는 손으로 내 얼굴을 만지는 걸 좋아한다. 지금도 손바닥으로 내 볼을 어루만지면서 술에 취한 나른한 표정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근데 결국은 이렇게 돼버렸네.] [...지율아. 후회안해...? 나 잡은거...?] [이젠 별로. 오히려 다행이야. 내가 그동안 멍청한 짓 한거지.] 가슴이 다른 의미로 따끔거렸다. 내가 정말로 나쁜 아이 같아져서. 앞에 그토록 원하던 반지율이 있었는데. 주치원이야기를 듣는 내내 도성윤이라는 어쩔 수 없는 연상 작용을 했다. 마음이라는거. 도대체 몇 갈래로 이어져 있는 걸까. 뭐하는 녀석일까. 난. 술이라는게 그렇다. 솔직해지긴 하는데...어쩔때는 우울해지기도 한다. 우울했다. 알콜향이 가득한 키스에 정신이 몽롱해진다. 눈을 감았는데...지금 나와 키스하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모를 정도였다. 성윤이와 연락이 끊긴지 이주째 되던 날엔 문득 평상시처럼 대하자던 녀석의 말이 떠올라 들어선 안 될 섭섭함 마저 들어 버렸다. 뭔가 예전에 하던 스토커 짓을 간혹. 솔직히 자주 했다. 론썸에 들어가 괜시리 성윤이 개인정보를 열어보는 짓들을 했다. 지금은 접속중이 아니었지만. 개인정보란에 성윤이가 남긴 멘트를 보았다. “17살에 사랑에 빠져 그녀를 위해 죽을 수도 있었어. 그런데. 2년이 지나니 기억조차 나지 않더군...“ -영화 그랑블루 中에서- 정말 2년이면 가능할까. 시간이 그렇게 모든 걸 다 해결해 주는 거야? 하지만 난. 지금만은. 현재에서는. 그럴 수 없을 거라 생각해. 예전에 그랑블루를 봤었지만 이런 대사가 있었던가 싶다. 성윤아. 너 혹시 나 때문에 힘들거나 한건 아니지? 그렇게 묻고 있는 내가 지독하게 이기적인건가...지금 난 행복...한데... 정작 날 웃게 해준다던 니가. 울고 있는건 아니지...? 나...솔직하게 너 보고 싶어. 너라는 친구는...왠지 다시는 만나기 힘들 사람 이라는거 알아. 핸드폰이 울렸다. 찍힌 이름에 재 빨리 폰을 열고 받았다. 성윤이였다. [여보세요?] [......] [...성윤아...너 어디야?] [...지금 나올 수 있어? 나 지금 너네 집 앞이야...] [...기다려. 지금 나갈게.] 늦은 저녁에 어딜 가냐는 엄마의 물음에 잠시 슈퍼에 간다며 밖으로 나왔다. 성윤이는 우리 집 앞에서 벽에 몸을 기댄 채로 있었다. [...도성윤.] [나왔네. 생각보다 빨리.] [...너 연락 죽어라 안하더라.] [너야말로. 실수로 한번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술 먹었어...혹시?] [응. 오늘 치원이가 이영이랑 결국 헤어졌대...그래서 문이영이랑 둘이서 먹었어...주치원 그놈은 오늘도 사랑하는 그녀의 집 앞에 갔을 거야.]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주치원이라는 애를 실제로 한번도 본적은 없었지만, 아직도 김지수...를 좋아하는구나. [얼마나 먹었는데...? 너.] [으응...아마도 이영이만큼 먹었나?] [그 이영이란 애는 얼마나 먹었는데?] [아아. 그게...머리속에서 잠시나마...치원이를 잊어버릴 수 있을 만큼...?] [......] [나도 거짓말쟁이다.] 술에 취해서 약간 꼬부라진 어조로 말을 하는 성윤이는 왠지 쓰러질 것 같아서 불안했다. [맨날..그래. 강한척...하는거...아무렇지 않은척...] [막 겁쟁이면서...겁쟁이 아닌 것처럼 굴어. 사실 약해빠진 주제에...] [아픈데 웃는척도 잘해. 내 특기야...왜냐면 미움받지 않을려고...남이 날 좋아해주길 바래서...그래서 병신같이 맨날 웃고 다녀...] 내 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오던 성윤이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바닥에 풀썩 앉는다. 걱정돼서 다가가 성윤이를 일으키려 했다. 허나 성윤이가 손을 뻗어 내 손목을 잡더니 같이 땅에 앉게 했다. 고개를 들더니 묘한 웃음을 지으며 속았지? 나 사실은 멀쩡해. 하며 말한다. [멀쩡하긴...술에 취해서 몸도 제대로 못 가누면서 여긴 왜 왔어?] [...너 보고 싶어서. 아무래도 내가 이영이보다 덜 먹었나...아무리 먹어도 안 지워져...] 그리고 날 확 끌어안는다. 난 거부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전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김한결...원래는 말야...그날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냥 너 편하게 대하려고...생각은 했어. 그래...천천히 기다리자...했는데...] [......] [무린거 같아...힘들다...나도 반지율 싫어. 치원이보다 내가 더 싫어...] [...너 어쩔려구 자꾸 이래...] [난 말야...항상 바보짓을 잘해...옛날부터 그랫어...옛날에도...] [성윤아. 취했다. 일어나자. 집까지 데려다 줄게.] [김한결. 난 니가 좋아. 정말로 좋아.] [알았어. 다 알아. 그만 일어나.] [좋아해.] 그렇게 내가 어디라도 갈 것 마냥 더욱 더 세게 껴안는 성윤이의 등을 토닥거리며 좋아해. 소리를 몇 번이나 듣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만약에 지율이보다 성윤이를 먼저 만났더라면...얼마나 좋았을까... [...안 줄거야...] 뭘 안 주겠다는 이야기일까...난 너한테 이미 너무나 많은 걸 받았는데. [나한테 더 이상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돼. 성윤아.] [...큭...너도 진짜 둔하다...] [......] [...안 줘...] 뛰고 있는 심장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갈 정도로 세상은 온통 조용했다. 밤 하늘에는 별도 달도 없이 온통 까맣게 번져있었다. 그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성윤이의 이런 모습 어떤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Logout 꿈을 꾼다. 내가 혼자서 지루해 할까봐 가끔씩 나타나준다. 엄마가 학교가라고 깨우는 꿈이다. 졸린 눈을 비비고 방안에서 나가면 아빠는 신문을 든채로 곧 차려질 아침을 기다리며 식탁에 앉아계시다. 큰누나는 오늘도 회사에 늦었는지 무서운 속도로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를 남기며 현관으로 달려간다. 작은누나가 그제 서야 일어나서 엄마 밥 줘요. 하며 하품을 했다. 할아버지는 아침 바둑 프로그램을 항상 놓치지 않고 보고 계셨다. 직접 만드신 낡은 흔들의자가 언제나 지정석이다. 먹기 싫은 우유를 억지로 먹이는 엄마에게 뭔가 불평을 하다가...거기서 꿈은 끝이 난다. 작년에 돌아가셨던 할아버지가 그랬다. 남자는 절대 우는 게 아니라고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울면 안 된다고 말씀 하셨다. 그 일이 있고 나서, 그런 이야기도 해주셨다. 넌 변하지 않아도 좋다고. 너답게 사는 거라고. 앞으로도 조금도 변할게 없다고. 그건 말도 안돼요. 울면서 소리쳤었다. 어떻게 변할게 없다는 거지. ‘세상이 다 변해도 너만 바뀌지 않으면 돼는 거야. 학교를 다니고, 공부를 하고, 친구들과 놀러 다니고, 너는 계속 즐겁게 웃으며 살아가렴...‘ 하지만 그 말씀을 하시던 할아버지 눈가에 눈물이 살짝 고인 것을 봤다. 처음봤다...크게만 느껴지던 존재가 약해지는 모습이었다, 그렇구나. 그래서 남자는 울지 말라는 거구나...약해지는 거구나. 그래 내가 울면 지는 거야. 현실에. 나가지 않던 학교에 나갔다. 내가 없어도 모든 건 잘만 돌아가고 있었다. 수업진도는 무서울 정도로 진전되어 있었고. 반 아이들은 다들 웃으며 떠들고 있었다. 아무것도 바뀔게 없구나...그래...나 때문에 세상이 바뀌는 건 아니었어.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그 속에 어울려서 같이 웃었다. 그래. 난 지지 않을래. 나답게 살거야. 변하지 않아. 나는 도성윤이고. 우리 엄마도 아빠도 누나들도 다 그랬다. 난 웃을때가 가장 잘 어울린다고. 그래서 그렇게 살았었다. 계속해서. 어떤일이 있어도...나 다운게 가장 좋은거라 믿었으니까. [다녀올게요. 할아버지. 아빠 엄마. 누나들. 오늘은 날씨가 끝장나게 좋아요. 왠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거든. 혹시라도 생기게 되면 집에 오자마자 말해줄게요.] 기스가 여기저기 나 있는 마루 바닥위에는. 작은 탁자에 올려진 조금은 뿌옇게 먼지가 끼인채로 항상 그 자리에 놓여있는 어떤 가족사진의 액자가 있다. 창 넘어로 아침이 밝아왔음을 알려주는 빛을 받으며, 그 사진 속의 얼굴들을 하나하나씩 비춰준다. 행복했던 시절. 돌아오지 않을 웃음들을 그 안에 가둬놓은 채로 남겨진 사람에게는 세월이 흘러가도 변하지 않을 미소로 향한다. 다들 금새라도 입을 열어 말해줄 것 같다. 잘 다녀와. 하면서... 다시 한번 다녀올게. 말하는 아이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열렸던 현관문이 닫힌다... [너 왜 또 왔냐?] 지율이 태우고 잇던 담배 한 가치를 담벼락에 눌러 지지며 내뱉는다. 성윤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대꾸한다. [이거 니네집이야?] [...한결이네 집이잖아. 너 빨리 니네 학교나 가라.] [우리학교도 어차피 같은 방향이거든. 반지율.] [...좋은말로 할때 빨리 꺼져.] [아. 한결이 나왔다.] 좋은 아침. 으로 시작되는 성윤의 인사와 함께 그날도 언제와 같은 하루가 열렸다. 말없이 인상만 쓰는 지율도 성윤의 끝이 없는 이야기를 싫던 좋던 귀 기울이고 있었고, 한결은 웃을까 말까 고민하는 중이었다. 조금은 과장스럽고도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성윤이는 항상 웃으며 그 자리를 지켰다. [너 좀 포기할때도 안 됐어? 진짜 지겨워.] [글쎄. 원래 삼각관계 라는건 언젠가는 깨지기 나름이니까.] [......] [알았으니까 제발 그만 떨어져 나가.] [그러니까 반전의 묘미가 있는거라구- 뭐. 옆에 있을 때 잘 해라.] [...저기 고양이 지나간다...] [어디? 나 고양이 진짜 좋아해.] [......아. 지나가 버렸네...] 정말 고양이가 지나갔는지는 알 수 없다. [...김한결...너 학교 가서 보자.] [한결아. 쟤가 너 괴롭히면 나한테 와. 치원이하고 둘이 때려주러 갈게.] 등 뒤로 비춰지는 세 개의 크기가 다른 그림자들은 아마도 당분간은 이대로 늘어져 있을듯 싶다. 그러니까. 그건 당신 주위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어떤 평범한 이야기. 여기서 끝나지 않고 어디선가 계속 이어질 것이라 믿는다. 사용자가 많아서 서버의 접속이 원활하지 않습니다. 잠시후 다시 로그인해 주십시오. ID [하얀나비] PASS [******] [LOGIN] “아. 맙소사. 또 튕겨버렸네.” 잠깐만......그래서, 이거 뒷이야기는 어떻게 돼는 거야? 잠시 생각해봐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여자는 푹신한 쿠션이 달린 의자에 등을 기댄채로 백색 모니터 안을 지긋이 바라보며 말한다. “...뭐. 나중에 셋이서 어떻게든 되겠지. 안 그래?” 그녀는 왼쪽 손등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남아있는 다른 쪽 손을 이용해 접속창을 종료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하지만 어딘가에는 그 둘을 연결해주는 보이지 않는 끈이 분명히 존재 하고 있다. 지금. 당신의 ID는 무엇입니까? 로 그 아 웃.